재고부담 떠안는 국내 유통구조에서 영세 디자이너 살아남기 힘들어
"촉망받는 디자이너들이 왜 너나 할 것 없이 해외 쇼룸으로 나가려 하는지 아세요? 100% 사입제로 운영하는 미국과 유럽 패션매장의 특성상 영세한 한국 디자이너들이 재고부담 없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디자이너들은 왜 그토록 해외로 나가려고 안달이냐"는 질문에 국내 한 패션디자이너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진 패션시장에 자신만의 브랜드를 알리고 더 큰 무대에서 겨뤄보고 싶어서 해외로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 기자의 고정관념을 단번에 깬 대답이었다. 이 디자이너는 "할 수만 있다면 안방에서 인지도를 더 넓히고 싶은 것이 모든 신진 디자이너들의 속내"라며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사입제'란 판매사업자가 공급자(디자이너)로부터 상품을 매입해 이를 다시 고객들에게 판매하는 것으로 공급자는 팔리지 않은 재고를 떠안지 않아도 된다. 반면 위탁판매는 공급자가 판매를 백화점이나 편집숍 등에 맡기고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지급받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상품 판매만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재고부담은 고스란히 공급자 몫이다. 국내 대부분의 패션 유통 채널은 이 위탁판매로 운영된다.
이렇다 보니 영세한 신진 디자이너들은 재고 부담을 떠안고 한국에서 사업할 자신이 없다. '대박' 아이템이 나오는 것 자체가 되레 부담인 경우도 많다. 또 다른 디자이너는 "최근 한 디자이너의 핸드백이 빅 히트를 쳤는데 여러 곳에서 주문이 몰렸다"며 "공급량이 급증하며 재고도 늘어 결국 그 디자이너는 사업을 접었다"고 말했다. 한국 매장에서는 독특하고 신선한 디자이너 제품을 보기 힘든 진짜 이유다.
그러나 최근 이런 영세 디자이너들에게 희소식이 들린다. 현대백화점 목동점은 4일까지 '패션 신진디자이너 10인 초대전'을 사입제로 진행하는 파격 실험을 하고 있다. 재고 부담이 없다보니 디자이너들은 셔츠와 드레스를 8만~19만원 정도의 헐값(?)에 내놓고 있다.
물론 사입제가 위탁판매에 비해 절대 유리하다고 볼 순 없다. 자칫 공급자가 판매사업자보다 '갑'인 경우 재고부담을 판매사업자에 떠넘기는 편법으로 변질될 수 있다. 하지만 영세한 디자이너들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해외로 내몰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사입제는 디자이너의 숨통을 터주는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