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마에 눅눅해진 몸을 일으켜 눈 비비며 조간을 펼친다. 분명 오늘은 2013년의 어느 날이거늘 신문 속 기사들은 내 시계바늘을 어김없이 과거로 돌려놓는다. 남북도 그대로고 정치권과 노사는 첨예하게 대립하며, 변함없이 팍팍한 서민들의 삶과 불안한 미래를 마주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은 20년 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과거와 싸우는 순간 우리가 미래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 숱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럼에도 우리는 전진해 온 것인가?
답답한 마음으로 신문을 보다가 하단 기사에 눈길이 머문다. 미국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납치와 10년만의 탈출에 관한 보도였는데, 나를 놀라게 한 건 사건의 엽기성보다는 탈출에 성공한 세 여인의 기자회견 내용이었다. “증오로 소중한 내 인생의 시간들을 낭비하지 않겠다.” 이유도 모른 채 초등학생 때 납치된 후, 꿈 같아야 할 10년 세월을 음험한 지하실에서 보내야 했던 여인의 한마디는 카프카의 도끼처럼 내 얼어붙은 머리를 쿵 하고 내리찍었다.
며칠 후, 또 하나의 기사를 접하게 되었으니 이름하여 ‘채팅갈등이 부른 살인 사건’. 정치적 견해차이가 갈등과 모욕으로 번지고 급기야는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기사였다. 채팅하고 갈등하며 분노하다 살인에 이른, 그리하여 이젠 일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가해자가, “인생을 잘 사는 비결은 진실로 가치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무가치한 것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라는 아우렐리우스의 충고를 가슴에 담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채팅으로 논쟁을 하고, 댓글로 누군가를 모욕하며, 술자리에서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으며, 나는 이에 대해 반박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주장에 반박하는 것은 실로 내 인생에 무가치한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가치있는 일은 무엇인가? 삶의 가치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정하는 주관적인 판단이니 모두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소중한 것들 대부분은 우리 모두 가까이에 있다고 내 경험은 말한다.
벌써 6년이 지난 일이다. 출장 차 울산행 비행기에 탑승해서 핸드폰 전원을 끄려는데 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무언가 얘기하려는 딸에게 “아빠가 기내에 있으니 울산에 도착해서 전화할게”라며 전화를 끊었다. 사실 승무원들이 안전벨트와 짐들을 점검하느라 오락가락하는 시간대였기에 잠깐의 통화는 괜찮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전화를 끊은 것이었다.
이륙 후, 이게 웬일. 공포스러울 정도로 비행기는 요동쳤고 승객들 모두 숨 죽이며 기내 방송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지금 내게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지난 세월 열심히 살아왔으니 후회는 없다”라는 생각은 나를 신기하리만큼 평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 한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조금 전 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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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여 일을 잘 마치고 올라온 그날 저녁, 나는 내 삶의 가치 목록에 두 가지를 추가했다. 지금 당장 죽어도 “나 참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제대로 살자는 것과 소중한 것은 미루지 말고 즉시 하자는 것이다. 중요한 바이어와 저녁식사 중에 딸의 전화가 울린다. 예전 같았으면 조용히 끊었을 전화를 지금은 양해를 구하고 받는다. 무엇이 내 인생에 더 가치있는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Memento Mori! 가끔씩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이 팍팍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상상컨데, 지금 죽음 앞에 선 당신에게 남는 아쉬움은 무엇인가? 돈 많이 벌지 못한 것? 승진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어느 날 엄마에게 툭 던진 모진 말, 딸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했던 그 날, 친구의 눈물을 닦아 주지 못했던 바빴던 일상, 그리고 도전하지 못한 용기들, 아마도 그런 것들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많은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산다. 하지만 자학하지 마시라.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참 좋았지”, 소중한 사람이 떠난 후에야 “그때 좀 더 잘할 걸”이라 생각하는 뒷북은 2000년 전에도 울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항상 지금 이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그리고 나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 버리는 상상을 하며 살라고 가르쳤다.
지금 이 자리가 내 딸과의 마지막 식사라면, “왜 성적이 떨어졌니?” “늦잠 자는 버릇 안 고칠 거니?”와 같은 꾸중으로 소중한 식사시간을 보낼까? 아닐 것이다. “주먹만한 게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줘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성적 좀 떨어지면 어때, 네가 즐겁고 행복한 거 같아서 보기 좋다”라는 대화를 나누게 되지 않을까? 스티브 잡스의 말마따나 죽음 앞에서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게 되니 말이다.
“지금 내가 소비하고 있는 시간이 나의 가치있고 풍요로운 삶과 관련된 것인가?”라는 질문 없이는 행복한 삶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오늘도 신문을 넘기며 기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세네카의 질문을 던진다.
“왜 살아있는 동안 사랑받는 존재, 떠났을 때 그리운 존재가 되도록 자신을 만들지 않는가? 왜 즐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즐겁지 않은 삶을 사는가? 왜 그렇게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