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정부 들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창조경제'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기존 틀을 벗어난 새로운 방식으로 경제적 가치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넓게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벗어나야 할 '기존 틀'은 과연 무엇인가? 논의 전개 양상을 보면 혁파의 대상은 바로 창조적 경제 행위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regulation)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중국에서 인기를 모은 한류드라마에 등장한 상품을 사려던 중국 소비자가 규제(?) 때문에 거래를 하지 못하게 된 일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시정을 요구한 사례도 있다.
그런데 기시감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거나 줄이겠다는 정부 차원의 공약은 사실 낯설지 않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갖가지 규제개혁 공약이 제시되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여전히 사람들은 곳곳에서 마주치는 규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그동안 여러 가지 불합리한 규제를 개혁하기 위해 많은 이가 노력한 게 사실인데 왜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이쯤되면 무엇을 혁파하려 한 것인지, 혹시 엉뚱한 것을 철폐 대상으로 삼아온 것은 아닌지 다시 자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에서 정부로부터 사업자금이나 연구비를 받아본 사람들은 모두 자금집행에 관해 '집행 가능한' 항목과 '가능하지 않은' 항목을 빽빽이 적은 가이드라인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린터기기는 가능하지만 소모품인 토너는 구입이 불가하다거나, 데스크톱 컴퓨터 구입은 되지만 노트북 컴퓨터는 안 된다거나, 회의비를 집행하려면 최소 몇 명 이상 모여야만 가능하고, 직장 반경을 얼마 이상 벗어나면 회의비로 인정이 안 된다거나 등이 그런 것이다. 집행자금의 특성이나 경우에 따라 세부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대개 이런 식이며 해를 거듭할수록 내용이 추가된다.
이런 규칙들은 대개 과거에 발견된 일탈 사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누군가 개인용도로 노트북 컴퓨터를 구입했다는 사례가 발견되면 해당 항목이 추가되고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적인 모임을 갖고 회의비를 집행한 사례가 발견되면 그에 대한 항목이 또다시 추가된다. 목록은 그렇게 갖가지 항목으로 가득차지만 이 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또 어떤 기상천외한 자금유용 사례가 새롭게 등장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선량한 사람의 선택범위가 심하게 축소되고 비틀리게 된다는 점이다. 정작 연구에 노트북 컴퓨터가 필요해도 규정상 구매가 불가능하고, 아이디어를 나누기 위한 자리에서 회의비 집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발생한다. 융통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규정대로 따르거나, 아니면 편법(혹은 불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한 쪽에서는 규제를 없애고자 하는데 다른 한 쪽에서 불합리한 규제조항이 계속 만들어지고 추가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규제조항 자체보다 규제가 만들어지는 '생산과정'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생산과정의 원인은 바로 수직적(top-down) 의사결정 방식에 있다. 계획경제체제가 비효율로 붕괴된 것처럼 위에서 온갖 조항을 추가하는 식은 현장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결코 따라잡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별 일탈 사례에 과민반응을 보이기보다 유사 사례가 발생하는 빈도 분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물고기 하나하나를 다 조준해서 잡아내려고 하기보다 넓은 그물로 두드러지게 큰 것들만 낚는 식이다. 위에서는 분포에 기반한 큰 틀만 제시하고 세부적인 것은 현장에서 적용하고 해결하는 방식이다.
독자들의 PICK!
게임을 운용하는 규칙에는 예외를 담기 위한 빈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전체 틀만 마련하고 나머지는 선수들과 현장의 심판에게 맡겨야만 게임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