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이 주전산기 교체논란과 관련해 임영록 전 KB금융그룹 회장과 이건호 전 KB국민은행장에 대해 '문책경고'라는 레드카드를 꺼낸 지난 9월4일. 이 행장은 바로 실무자를 행장실로 불러들였다. "이 시간부로 사임한다"는 발표를 하라며 'KB'라는 경기장을 스스로 걸어나갔다. 실무진은 황망했지만 발표자료를 준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령탑이 중도에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국민은행 시절에는 김정태·강정원 행장이 불명예 퇴진을 했다. 지난해 6월에는 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도전했다가 낙마한 민병덕 행장이 중도사임했다. 실무자들은 과거 참고자료가 많은 덕(?)을 톡톡히 봤다. KB금융과 은행이 걸어온 잿빛 자화상이다.
시선을 NH농협으로 돌려보자. 카드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돼 한바탕 난리가 난 지난 1월. 임종룡 NH농협금융 회장은 매일 저녁 6시에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는 김주하 NH농협은행장을 비롯한 관련 임원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임 회장은 신속히 역할분담을 교통정리했다. 김 행장이 회의에 와야 하는 부담을 덜어줬다. 은행의 전반업무를 정상적으로 챙기라는 배려였다. 대책을 주관하는 일도 카드부서가 아닌 은행 전략기획부장에게 맡겼다. 예산과 인사지원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임 회장과 김 행장의 이런 역할분담 아래 당시 사태로 인한 충격의 먹구름은 점차 벗겨져 갔다. KB금융이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 화합을 위한 템플스테이에서조차 잠자리를 놓고도 수뇌부 2명이 다툴 정도인데 "회의에 와라, 마라" 자체도 충분한 시빗거리가 됐을 법하다. 금융지주 내 힘겨루기와 잡음은 시스템문제인가, 사람문제인가.
NH금융은 말이 금융지주지 위에 농협중앙회라는 '상전'이 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말이 자주 들리곤 하던 곳이다. 그런데 임종룡 회장이 오더니 어떤 소음의 주파수조차 잡히지 않는다. 농협 토박이 입장에서 보면 임 회장은 '굴러온 돌'이다. 김 행장은 농협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1955년생으로 1959년생인 임 회장보다 네 살이 많다.(공교롭게도 말썽이 난 KB금융은 임 전회장이 55년생, 이 전행장이 59년생이다.) 얼마든지 갈등이 내연할 수 있는 조건이지만 두 사람을 보면 거의 찰떡궁합이다.
최근 두 사람과 각각 대담을 할 기회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참 온화하고 인격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서로가 서로를 칭찬한다. 김 행장은 임 회장이 공직으로 호출돼 농협을 떠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할 정도다.
이런 '이인삼각'의 화합 분위기에 힘입은 덕분인지 실적 또한 승승장구한다. NH농협금융은 우리투자증권을 인수해 사업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덩치도 단숨에 키웠다. 총자산 규모 면에서 등수에 끼지도 못했는데 이젠 당당히 '동메달'감이다. 은행도 실적으로 화답한다. 올들어 지난 8월까지 5대 시중은행의 예수금 증가액 가운데 거의 절반 가까이가 농협이 늘린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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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의 사례를 보면 금융지주의 성패를 가름하는 열쇠는 운용, 즉 사람이 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회장이 은행장을 겸직하든 말든 제도가 이슈가 아니라는 것이다. '척하면 척'하는 것은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가 해야 할 게 아니라 지주 회장과 은행장이 보여줘야 하는 모습이다.
KB사태에서 얻은 교훈은 회장과 행장, 둘 다 외부 줄을 타고 내려오는 게 최악이라는 점. '너나 나나' 하는 분위기라면 지주라는 배는 산으로 올라가버린다. 이번 기회에 금융권 인사에 외부 개입이 없어져야 한다. 그러기 싫으면 숨어있지 말고 사후책임도 분명히 지든지 말이다. 대리인 2명의 다툼으로 조직을 망가뜨리는 일, 주주들의 항의가 메아리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