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시평] 다수의 무지

[MT 시평] 다수의 무지

손동영 기자
2014.10.22 07:44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한스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망토가 등장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나에게만 안 보이면 어떻게 하나? 자신의 어리석음이 드러날까 두려운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망토를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결국 가엾은 왕은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활보하기에 이른다.

우스운 동화 속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현상을 우리 주변에서 관찰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대다수 교양 있는 사람이 읽었으리라 생각하는 제목만 대면 모두 아는 유명한 고전을 실제 읽은 사람은 극히 드문 경우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의 작업을 동료학자 대부분 알고 이해하는 것 같지만 실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경우, 실제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이 가치를 높이 평가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주식의 가치가 상승하는 경우 등 유사한 사례는 사실 끝이 없다.

사회과학자들이 '다수의 무지'(pluralistic ignorance)라고 명명한 이 현상은 특정 이슈에 대한 개인들의 의견과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 갖는 추측이 크게 어긋날 때 발생한다. 스스로는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다수가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믿는 사람이 다수가 되면 거짓이 사실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자신의 감추어진 이중성(겉으로는 사실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믿지 않는)이 드러날까 두려워 더 열렬히 믿는 척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태는 서로에 대한 구속을 더욱 강화한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이나 오늘날의 종교, 정치판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도 종종 관찰되듯이 타인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데 앞장섬으로써 자신의 순수함을 입증하려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열렬히 사실이라고 믿는 대다수의 면전에서 사실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러한 가공의 질서는 계속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무지 현상은 소통을 가로막는 규범적 장애물이 많고 외부와 차단된 폐쇄적 환경에서 일어나기 쉽다. 역설적이게도 엘리트집단과 같이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은(그래서 잃을 것 또한 많은) 사람이 모인 집단이 다수의 무지 현상에 더 취약하다. 오늘날 대한민국 관료집단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 과정은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드러낸다. 위아래가 확실한 조직구조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치부를 드러내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결국 다수가 침묵하게 되고 현실은 고착된다. 대통령의 의중과 그와의 관계가 더 중요한 반면 옳고 그름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실종된 환경은 그릇된 정책을 낳게 되고 결국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모두가 나누어 지게 될 것이다.

누구도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않지만 모두 순응하는 것처럼 믿을 때 악몽은 현실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면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입시지옥. 꿈이 넘쳐야할 청년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취업전쟁.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워 가족을 끌고 철마다 이사를 다녀야 하는 서민들의 고달픈 삶. 청년들에게 "청춘은 원래 아픈 거야"라고 위로(?)하고, 신혼부부들에게 빚 내서 집 사라고 권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거짓 질서를 깬 것은 어른들의 복잡한 규범적 사슬에 얽매이지 않고 이해관계의 득실을 저울질하지 않는 어린 아이의 발언이었다. 관료사회가 다수의 무지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래서 국가와 사회를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밀어넣지 않으려면 밖으로부터 현실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다수 의견에 의무적으로 제동을 걸고 소수의견(minority opinion)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을 회의에 배치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잘못된 정책의 후유증은 세대를 거듭하며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소통에 나서는 관료가 많아지기를 소망해본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천상희 기자

안녕하세요. 편집국 천상희 기자입니다.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