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미생'이 일으킨 사회적 반향이 만만치 않다. 아내들은 직장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가장을 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신입사원부터 임원까지 드라마에 나온 인물에 자신을 대입하며 스스로를 돌아본다. 무엇보다 공고한 사회의 벽을 마주하는 20대 젊은이들의 불안과 고뇌를 생생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미생'은 성공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가슴을 떨리게 하고 눈물짓게 한 진한 위로와 공감의 위력은 거기까지다. 여전히 오늘도 우리 사회의 20대는 도서관 구석 어딘가에서 토익점수를 올리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거나 이력서에 한 줄을 더하기 위해 해외연수에 시간과 돈을 쏟아붓고 정규직 전환의 가망이 희박한 현실에도 인턴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공부를 하고 때로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는데 여전히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길이 없어 헤매고 있다. '스펙'은 속이 텅 빈 개념으로 무조건 그 안을 채워야 하기에 어학시험 점수와 각종 수상경력, 인턴십 경험, 해외연수까지 닥치는 대로 해야 한다. 이러한 치열한 노력들이 나중에 직장생활에서 열매를 맺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을 기다리는 업무는 이제까지 쌓아온 능력과 대부분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업체 인사로부터 대학 졸업생들이 기업이 원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볼멘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런데 되묻고 싶다. 직원을 뽑을 때 요구한 능력과 그들이 실제 하게 되는 일의 연관성은 얼마나 되는가? 혹시 엉뚱한 것에 시간을 다 쓰느라 정작 필요한 능력계발에는 소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선발할 때는 각종 능력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지만 정작 들어온 사람은 기존 직원들이 하던 업무를 나누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 직원들이 신입직원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의 능력이 아니라 일을 나눠 맡을(그래서 본인들의 부담을 줄여줄) 인원이 필요할 뿐이다.
이런 상황은 기업만이 아니라 대학도 마찬가지다. 신임 교수를 초빙할 때 연구능력이 출중한 지원자를 선발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지만 일단 선발되고 나면 과중한 수업, 행정업무가 신임 교수를 기다린다. 한국 기업이나 대학에서 개인의 능력은 공동체가 맡기는 기존 업무를 다 처리한 다음에 남는 시간에 사용할 대체자원으로 취급된다. 수많은 젊은 학자의 연구에 대한 잠재력이 그렇게 맡겨지는 업무에 휩쓸려 사라져갔다. 그래서일까.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리를 채운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언어는 생각을 비추는 거울이다.
동상이몽. 한국 사회의 조직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렇게 안과 밖이 다르다. 지원자들은 능력을 발휘할 곳을 찾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눈물겨운 노력을 이어가는데, 정작 사람을 뽑는 조직은 신입 직원의 능력을 전혀 다른 시선에서 평가한다. 이런 시선의 불일치는 임의로 주어지는 업무를 가까스로 감당하며 버틴 사람들만이 살아남는 조직문화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
양질의 거친 원석을 찾아내 다이아몬드로 가공하고 성장시키는 데 큰 관심이 없는 조직은 결국 사전에 가공된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맨다. 서로 더 반짝여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서의 '스펙'은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이러한 '장식 경쟁'은 이제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각종 사회봉사 경력, 과외활동, 내신성적, 시험점수로 치장된 지원서들이 심사위원의 이목을 끌기 위해 경쟁한다. 이렇게 선발된 가공된 원석들은 또 다시 새로운 장식 경쟁에 돌입하고 이 연쇄고리는 끝없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낭비되는 시간과 에너지의 양은 고스란히 거대한 사회적 비용으로 되돌아온다. 이게 과연 최선일까. '아프니까 청춘이다' 유의 얄팍한 감성적 위로만으로 대신하기엔 젊은 세대가 낭비하는 삶의 에너지가 너무나 크다. 이제 소모적인 장식 경쟁을 줄이고 진정한 능력을 계발하는 데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성세대가 나서야 한다. 제대로 된 일에만 투신하기에도 20대는 너무나 짧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