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시평] 열린 조직의 적 ‘관료·비서적 문화’

[MT 시평] 열린 조직의 적 ‘관료·비서적 문화’

정영록 기자
2015.08.11 03:36

최근 장안의 화제는 단연 모 재벌의 승계다. 천문학적 재산규모, 자수성가한 재일교포, 007을 방불케 하는 이사회 개최 드라마, 90을 훌쩍 넘은 창업자의 입에 쏠린 관심 등등 경영권 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이번 사태를 한 기업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조직문화 전반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정부 기업 학교 정당 언론 각 부문에서 횡행하는 관료적, 비서적 문화를 업무적 문화로 바꾸는 것이 현 정부가 추구하는 혁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첫째, 비서문화로 가면 일하는 목적이 전도될 여지가 훨씬 커진다. 한 조직에서 일하게 되면 그 조직의 발전을 위해 적어도 주어진 한 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 조직의 문화가 비서문화로 흐르면 목적함수가 조직의 장의 목적함수와 혼동된다. 물론 그 조직의 수장이 조직경영에 대한 훌륭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가계승계가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이익 추구가 조직의 이익 추구를 앞설 수도 있게 된다. 그럴라치면 조직원들이 조직의 장의 입만 쳐다보게 되고 왜곡된 조직운영으로 연결될 위험이 크게 내포되는 것이다.

둘째, 비효율성의 극치로 흐를 위험이 있다. 몇 년 전 한·중 고위 장관회담에서의 일이다. 우리 측 장관은 아직도 시나리오를 들고 그대로 읽고 있었다. 중국 측 장관은 달랑 메모지 한 장을 들고 수치 등만 참고로 하고 있었다. 중국 측에서의 장관회담은 서로가 얼굴을 맞대고 머리를 써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교환하는 것으로 변한 지 오래다. 중국 측이 보충질문을 했다. 그런데도 우리 측 장관은 시나리오대로 읽어 동문서답이 되고 말았다. 보다 못한 동석자가 중국 측이 질문한 내용을 귀띔하자 그제야 허둥지둥 대응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우리 측 통역이 회담이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지 않자 통역을 못 하게 된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이를 그대로 통역하는 것으로 사전에 입을 맞춘 모양인데 궤도를 이탈해버린 것이다. 우르르 동행한 국장들, 통역, 비서들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셋째, 소통에 의한 협업, 시너지 효과 극대화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조직의 슬림화를 부르짖은 때가 있었다. 이는 전 조직원이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뭔가 의견을 제시, 조직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일 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과거 황제, 대통령들의 회의스타일이 자주 얘기되곤 한다. 어떤 이는 끝까지 듣기만 하고, 어떤 이는 회의를 하면서 참석자에게 발언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고, 어떤 이는 반대의견을 적극 수용하고, 어떤 이는 반대의견에 역정을 내기도 하고. 회의마저 비서문화로 전락해 일방적으로 간다면 조직의 슬림화는 있으나 마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직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될 우려가 있다. 조직건전성의 핵심은 역시 인사일 것이다. 만점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70점 이상 인사들이 경쟁과 협력을 통해 승진이 이루어지면 그 조직은 무척 건전한 것이다. 그러나 승진이 비서문화에 근거, 학연·지연·혈연관계로만 이루어진다면 그 조직의 활기는 무력화될 것이다.

성장동력이 떨어졌다고 난리들이다. 하루빨리 업무형 조직문화로 바꿔야 한다. 빌 케이츠가 서류가방하나 들고 입국한다든지, 알리바바의 마윈이 청바지 차림으로 기자회견을 한다든지가 어쩌면 우리에게는 아주 낯선, 그렇지만 중·장기적으로 지향해야할 조직 문화일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지도자가 선도하면 이를 따르는 문화가 있다. 한때 대통령이 권위를 털어낸다고 사각형 탁자를 원형으로 바꾼 적이 있다. 모든 조직이 이를 따라했다. 대통령부터 솔선수범한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조직문화가 바뀔 수는 있다고 본다. 그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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