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금의 시대’(Gilded Age)라 불리는 1890년대 말과 1900년대 초 미국에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정치적 실천운동이 크게 일었다. 이 시대를 그래서 ‘진보의 시대’라 불렀다. 도시 차원에서도 다양한 진보운동이 진행됐다. 도시의 진보운동을 영국에선 자치사회주의라 불렀다면 미국에선 ‘진보도시 운동’이라고 했다. 정의, 분배, 형평성 등의 진보적 가치를 도시 차원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자치운동을 ‘진보도시운동’이라고 한 것이다.
미국에서 진보도시 운동의 전통은 연방정부의 보수적 정책운용에 맞서 지방정부 진보주의자들이 약자를 포함한 지역주민의 실질적 편익을 위한 다양한 개혁적 정책을 펴는 데서 생겨났다. 진보도시운동은 크게 약화되었다가 1970, 80년대 탈산업화로 급격한 도시 쇠락을 겪는 가운데 시민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동부도시들(보스턴, 시카고, 클리블랜드 등)을 중심으로 부활했다. 개혁적 시장의 등장과 함께 시정부를 개방해 시민의 참여를 대폭 허용하고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는 성장과 개발 중심의 의제를 사람 중심의 복지나 분배 중심으로 과감히 바꾸고 정부 대신 지역주민들이 지역사회 과제를 자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자치의 시민사회화 등이 진보도시운동의 중요한 방식이자 내용이었다.
이런 시도는 일부 도시에 국한했고 그나마 199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미국 주요 도시들은 첨예한 도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성장드라이브를 추진하는데 올인했다. 그에 따른 폐해가 2000년대 들어 속출했다. 소득계층간 불평등, 공공서비스 위축, 공공자원의 불공정한 배분, 계층격차 심화, 사회적 약자 배제, 부동산 개발 붐과 주거불안정, 빈곤의 심화, 성장연합에 의한 정책 편향화 등이 그러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주의자들이 다시 진보도시론을 들고나왔다. 뉴욕시가 대표적인 예다. 2015년 취임한 빌 드 블라지오 뉴욕시장은 복지, 의료, 주택, 일자리, 환경관리 등 모든 면에서 정치적·제도적 경직성 때문에 연방정부가 하지 못하는 정책을 뉴욕에서 보란 듯이 추진하겠다고 하면서 그러한 뉴욕을 진보적 도시라 스스로 불렀다. 전임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 하에서 뉴욕은 창조경제에 기반해 글로벌 경쟁력을 회복하게 됐지만 전체인구 20%가 빈곤선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도시빈곤 및 양극화가 더욱 악화됐다.
이런 도시적 상황을 배경으로 블라지오는 ‘뉴욕을 모든 사람을 위한 도시’로 만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워킹맘에 대한 보육서비스 확대, 사회적 임대주택 공급 확대, 인권 침해 소지가 큰 검문·검색 중단 등 사람 중심(특히 약자 우선)의 여러 도시정책을 내놓았는데, 이중에서도 임대료 인상 동결 정책은 대표적 진보도시정책으로 평가받는다. 뉴욕시를 필두로 진보도시정책이 여러 대도시로 확산되는데 이를 두고 골드버그는 “대도시 진보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최근 블라지오 뉴욕시장을 돕던 전문가들은 ‘진보도시’란 이름의 싱크탱크를 만들어 진보도시 전략이나 의제를 개발하고 자문하며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에는 현재 300여개 진보적 지자체의 연합체인 ‘지방적 진보’(Local Progressive)가 결성되어 활동 중이다.
최근 뜨는 미국의 진보도시운동은 빈곤, 양극화, 불평등, 배제 등의 문제로 이념적으로 다루기보다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해결하는 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쉬레거는 미국의 진보도시 이념을 그래서 자유주의 혹은 실용주의로 특징짓고 있다. 국가가 손을 놓은 민생과 민권의 문제를 자치의 틀 내에서 단체장이 근린지역사회와 함께 실용적으로 해결하려는 진보도시운동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