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4월 한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던 미국 ‘LA(로스앤젤레스) 폭동’의 발생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전해 3월에 있었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LA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한인 두모씨는 CCTV(폐쇄회로TV)로 흑인 여학생이 자기 가방에 음료수를 집어넣는 것을 확인하고 그가 도둑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계산대 앞에 선 그의 가방을 잡아채며 음료수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실랑이 끝에 여학생은 가방으로 두씨의 머리를 쳤고 돌아서서 가는 여학생을 향해 두씨는 권총을 발사했다. 여학생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두씨는 살인죄로 기소됐다.
그러나 이후 CCTV를 확인한 결과 여학생은 음료수를 카운터에 올려놓았고 음료수 값을 치를 2달러를 손에 쥐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흑인 여학생은 인근 고등학교의 우등생이었다. 재판은 잦은 흑인 강도에 시달리던 두씨가 충분히 착각할 여지가 있었고 따라서 정당방위를 인정한다며 사회봉사와 보호관찰을 선고했다. 분명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두씨의 착각이 불러온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대해 흑인들의 분노는 격렬하게 지속됐고 이어진 소요사태에서 한인상가에 대한 공격으로 폭발했다.
편견은 우리의 생각을 일정한 틀 속에 가둠으로써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편견은 또한 개인들이 갖는 차이를 무시하고 특정집단에 대한 선입견을 바탕으로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을 재단함으로써 자신이 특정집단에 대해 갖는 혐오를 합리화하고 자신이 드러내는 차별을 정당화한다. 편견에 기반한 혐오는 실제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미래에 자신이 오염될 수 있다는 추상적 위험에 근거해 있다. 즉 혐오는 실제 발생한 손상이나 위해가 아니라 자신이 오염될 가능성을 없애고자 하는 상상을 통해 특정집단을 배척하는 사회적 무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2020년 5월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무릎에 눌려 질식사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미국사회가 편견과 혐오를 중심으로 흑인과 백인이라는 2개의 민족으로 나뉘어 있음을 보여준다. 흑인 이외에 아시아인과 히스패닉이 있지만 이들은 거주지, 수입, 정치적 태도 등에서 백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미국이 흑인과 그 이외의 집단으로 나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흑인이 느끼는 위협과 절망을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일이다. 미국은 흑인의 사회통합에 실패한 대가로 적극적 차별시정정책과 다문화주의정책 등 다양한 제도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집단에 대한 편견과 상상 속의 위험에 기초한 혐오를 없애지 못했다.
우리 사회도 크게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담론 투쟁의 흐름은 보통 세 주체에 의해 좌우된다. 첫째는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고 둘째, 종교집단 그리고 셋째, 기업집단이다. 사회적 소수자 집단은 헌법에 명시된 차별금지에 근거해 법 제정을 주장하고, 종교집단은 동성애 허용 가능성을 이유로 반대하며, 기업집단 역시 비정규직, 장애인, 성 평등에 따른 고용의무에서 생겨나는 시장의 자율성 제약을 이유로 반대한다. 앞으로의 논쟁에서도 이 쟁점과 주체들은 다시 등장할 것이고 서로를 향해 전투적으로 편견과 혐오를 동원하며 충돌할 것이다. 누군가 우리는 코로나19(COVID-19) 이전의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 시절 일상에 만연하던 편견과 혐오, 차별은 경로를 우회하며 끈질기게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