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중략)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에 나오는 표현처럼 붉게 익은 대추도 그 열매 하나를 맺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달 1일부터 국내에 발효된 세계 최대의 자유무역협정인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을 보면서 붉은 대추와 같은 열매를 맺기 위해 애썼던 8년간의 지난한 협상이 떠오른다. RCEP 15개 국가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1500달러인 캄보디아부터 5만달러를 넘어서는 호주까지, 자본주의부터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도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포괄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국가들이 단일 경제블럭으로 출범하는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RCEP이 주는 여러가지 효과를 예상해본다.
첫째, RCEP은 세계에서 가장 젊고 역동적인 15개 국가의 시장을 대상으로 수출 7000억달러 달성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인구의 중간 연령이 29.2세에 불과한 아세안 국가는 RCEP 발효로 시장개방률이 90%를 넘게 되었다. 특히, 자동차, 부품, 철강 등 우리의 주력 제품뿐 아니라 섬유, 기계 등 중소기업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높일 것이다. 한류의 인기를 타고 화장품, K-푸드(K-Food) 등 소비재 수출도 크게 늘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 15개국의 원산지 규범이 하나로 통일돼 국내 기업들이 보다 쉽게 관세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원산지 누적 범위도 확대되면서 15개국 원산지 재료가 모두 역내산으로 인정돼 폭넓은 관세혜택을 누릴 수 있다. 원산지 규정의 개선은 특히 중소기업의 부담과 비용을 크게 절감하게 될 것이다.
셋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통상 환경에 대비해 역내 디지털 통상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의의도 크다. 전자상거래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고, 아세안 국가들의 게임, 영화 등 콘텐츠 시장 개방도 확대돼 K-팝(K-Pop) 뿐만 아니라 오징어게임이나 기생충 등으로 증명된 한류 콘텐츠가 역내 국가로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RCEP은 한국의 공급망 강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코로나와 보호무역주의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위협받고 있는 가운데, RCEP 국가들과의 공급망 협력 확대는 역내 가치사슬 강화하고 우리의 공급망 다변화를 촉진할 것이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8년의 협상을 거쳐 15개국과 타결의 순간을 함께 했던 필자에게 이번 RCEP 발효는 더욱 각별하다. 대한민국 협상팀은 역내통합이라는 공동 목표와 정부의 신남방정책 구현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해 협상 타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협상과정에서 비아세안 국가들을 대표하는 의장으로서 교착 국면에 빠질 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하며 협상의 활로를 모색했다. 새롭게 출범하는 RCEP이 성장잠재력이 막대한 회원국과 경제협력은 물론 사회·문화 전반의 협력을 이끌며 향후 수출 1조달러 시대를 열어가는 주춧돌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