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직립보행하는 동물이다. 두 발로 이동하는 동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척추와 다리 사이 각도가 거의 일직선인 직립보행은 인간만의 특징이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손은 물건을 잡고 운반하며 조작하는 등 정교한 작업에 사용되고 이는 인류가 도구를 사용해 지능이 발달하고 문명을 이룩한 배경으로 꼽힌다.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의 직립보행을 동물적 본성인 '수평성'에서 벗어나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수직성'으로의 이행이라고 봤다. 머리와 배설기관이 같은 높이에 있는 사족보행 동물은 땅에 몸을 수평으로 붙이고 살며 본능에 충실하지만 인간은 다른 신체기관보다 높은 곳에 머리를 두고 살면서 본능과 분리된 사유를 중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진흙탕 같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어도 인류가 숭고한 이상을 잊지 않는 이유다.
물론 바타유는 이러한 수직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 인간을 미래를 위한 가치축적을 위한 노동과 생산에 예속하는 억압으로 보고 그러한 위계를 전복하고자 하는 입장에 있다. 초월적 이성이 아닌 쓰레기나 땀, 피, 배설물처럼 땅으로 흘러내리는 비천한 물질들에서 존재의 비밀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가 추방된 후 낮은 영역에서 금기와 위반의 경험을 매개하는 사랑과 예술에 탐닉한 이유다.
자기파괴적이고 허무적인 그의 사상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기관총과 대포 같은 신무기의 등장, 그리고 전선을 두고 장기적으로 대치하게 된 당시 전쟁은 참호전을 일반화했고 이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불러왔다. 높은 지점에서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조감도(bird's eye view)적 시야와 반대되는, 땅 밑에서 제한된 시선으로 외부를 탐색하는 두더지와 같은 시선(mole's eye view)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땅과 거리를 두고 먼 지평선을 향해 내달리는 시야를 가진 직립보행의 인간이 참호에 갇혀 자유롭게 창공을 나는 독수리를 올려다보는 처지가 됐다. 현실과 이상 사이, 인류의 모순된 운명을 이보다 더 비극적으로 요약하긴 어려울 것이다.
독특한 빛을 담은 풍경화로 유명한 영국 화가 J M 윌리엄 터너의 1840년 작 '노예선'이 특이한 것도 그 시선 때문이다. 당시 보통의 그림이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 즉 바닥을 조금 내려다보는 위치에 시점을 둔 데 반해 이 그림은 요동치는 바다에 내던져진 노예의 시점인 양 금방이라도 물밑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터너는 다양한 역동적 관점을 얻기 위해 위험하게도 자신을 배의 돛대에 묶은 채 항해하거나 기차의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채 달리는 풍경을 봤다고 한다.
시각기술 매체는 현실 속에서 인류가 마주하는 수많은 위험의 순간과 함께했다. 때로는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두게 하고 때로는 그 자체로 폭력의 장소가 됐다. 예를 들면 터너는 자신의 몸 대신 카메라를 돛대나 기차에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굳이 비참한 전쟁 없이도 우리는 영화에서 하늘의 독수리 시선으로도, 복잡한 길거리의 돌멩이 위치에서도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한편 2차 세계대전의 대량살상무기와 연동된 항공정찰 기술은 그 반대의 예다. 지구 곳곳을 블록 단위로 스캔할 수 있는 위성지도 기술도 언제든 감시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최근 지도앱과 연동해 '친구위치 찾기' 서비스를 시작한 국민 메신저가 비난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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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S 시대, 위성의 '눈'이 지시하는 길을 따르면서 우리가 정작 보지 못하는 것은 없을까. 내비게이션이 말하는 '직진'이 정말로 '똑바른' 길은 아니다. 길을 좀 잃더라도 자기만의 지평선을 밟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