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이야기가 무르익는 시간들

[청계광장]이야기가 무르익는 시간들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2026.01.02 02:05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새해 첫날에 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이 많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유독 새해 아침의 태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제까지의 삶은 완결되었고 오늘부터 전혀 새로운 시간이 시작하는 것처럼 믿고 싶은 이유 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삶보다 발전하고 나아가는 인생을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과거로 묶고 다가올 시간을 향한 기원으로 삼는 일은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삶이 선형적인 구조의 서사(이야기)라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특히 그 안에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다면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경험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대개 부정당하고 쉽게 내면화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을 갖는 이야기의 형태로 정리되지 못하는 그러한 기억은 그렇다고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불쑥불쑥 현재를 침범하며 주체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는 기억에 저항하는 주체와 그러한 억압을 뚫고 반복해 등장하는 증상으로 이해된다.

이야기를 활용하는 심리상담이 트라우마 치료에 사용되곤 하는 이유다. 독일 사상가 발터 베냐민은 고통과 이야기를 강물과 댐의 관계로 비유한 바 있다. 그는 "병을 이야기의 강물 위로 흘러가게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병이라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우리가 아픔에 고여 있지 않도록, 즉 삶이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야기의 흐름을 묘사한다.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이야기의 힘은 '아라비안나이트'로도 알려진 '천일야화'의 중심 주제기도 하다. 영겁의 시간을 의미하는 천일(1001)일 동안 세헤라자데는 매일 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끝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녀는 다양한 모험담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더 나가 잔혹한 왕 샤흐리아르의 폭정을 멈추고 백성과 나라를 살렸다. 이 이야기는 세헤라자데에게는 두려움과 폭력의 밤을 통과하는 용기와 지혜를 뜻하지만 왕 샤흐리아르에게는 불신과 분노를 치유하는 시간의 지속을 의미할 것이다. 양쪽 모두 어둠을 통과한 이야기는 결국 아침의 빛을 맞이하게 된다.

신화 속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대지와 풍요의 신 데메테르와 제우스의 딸인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다. 그녀는 꽃을 꺾다 지하세계로 끌려가게 되고 슬픔에 빠진 데메테르는 모든 활동을 멈춘다. 대지는 황폐해지고 생산이 멈추어 모두가 힘들어지자 결국 제우스가 페르세포네를 다시 불러오지만 그녀를 완전히 돌아오게 하는 데는 실패한다. 하데스의 계략으로 명계에서 석류 몇 알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하와 지상에서 6개월씩 나눠 살게 된 페르세포네는 계절을 오가며 시간을 멈추었다 다시 흐르게 만드는 저승의 여왕이자 풍요의 신으로 자리매김한다. 매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녀의 귀환이 곡식이 싹트는 계절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한 시작과 끝을 기대하지만 삶이라는 이야기는 단절될 수 없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떠오르는 것이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기다림 끝의 결실인 것처럼. 우리는 고통과 상실을 삶의 서사에서 삭제하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모든 이야기가 희극일 수는 없다.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계절의 순환도 무의미한 반복일 뿐인 것처럼.

가까운 사람들과 만남이 잦은 연말연시는 뜻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특히 새해는 어둠을 통과해 온 빛을 찾기에 적기다. 서로가 충분히 아파하고 또 충분히 위로할 수 있도록 서로의 진실한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오비디우스의 '슬픔의 노래' 중 다음 구절은 희망차다. "어두운 구름으로 가려졌던 태양이 그 구름을 뚫고 나왔을 때 그 빛은 더욱 멀리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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