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4월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고 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읍성과 다대포진성, 20일 김해읍성이 차례대로 함락됐다. 모두 왜군이 포위해 성곽을 본격적으로 공격한 지 하루나 이틀 만이다. 전투에 임한 조선군과 왜군의 수는 적으면 10대1, 많으면 20대1 정도는 된 것 같다. 이런 수적 열세에 초점을 맞춰 패배의 원인을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하지만 이런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야전에서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가 패했다면 필자도 수긍하지만 네 전투 모두 성곽 방어전에서 패배였다.
세계사적으로 평지성(平地城)은 높은 방어력을 갖추기 위해 성벽을 10m 이상으로 높게 쌓고 넓고 깊은 해자(垓子)를 파서 둘렀으며 문에는 옹성(甕城) 등을 쌓아 이중방어 형태를 취했고 치성(雉城)을 축조해 성벽을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장치를 만들었다. 이렇게만 하면 10대1이나 20대1의 전력 차이에서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어 하루, 이틀 만에 함락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현저한 수적 열세에도 훌륭히 방어하거나 함락되더라도 적에게 큰 피해를 줘 전쟁 전체의 흐름을 유리하게 만들어낸 성곽 방어전을 찾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과 진주대첩도 이런 사례 중 하나다.
임진왜란 초기 성곽 방어전이 하루나 이틀 만의 함락으로 끝난 이유는 간단하다. 네 성 모두 평지 부분의 성곽 높이가 잘해야 5~6m밖에 되지 않고 깊고 넓은 해자도 갖추지 않아 성곽 자체의 방어력이 낮아서다. 이런 성곽으로 10대1이나 20대1의 전투력 차이를 극복한다는 것은 조선은 물론 어느 국가 어느 문명권에서도 기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중과부적이라 어쩔 수 없는 패배였다는 설명은 성곽 자체의 방어력이 낮음을 숨기는 것이기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네 성곽의 함락 이후 읍성이나 진성을 거점으로 성곽 방어전을 펼친 것은 1592년 8월28일부터 9월2일까지 벌어진 황해도의 연안성, 즉 연안읍성의 전투가 유일했다. 군사 수는 조선군 1400명 대 왜군 5000명 정도였는데 '선조실록' 1593년 9월25일 기사에선 이때의 승리를 이렇게 평했다. "지난해 (연안읍)성을 지키기는 했으나 이는 왜적의 수가 적기 때문이었으니 요행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왜적을 만났다면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확한 평가다. 더 많은 왜적이 와서 10대1 정도의 열세라도 됐다면 연안읍성으론 방어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평지 부분의 성벽이 너무 낮고 해자도 만들지 않아 방어력이 없는 성곽의 최초 출현은 후삼국 시대의 개성이고 고려 말, 조선 초부터 활발히 축조된 읍성과 한양도성에도 적용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여기서 역사의 이런 미스터리 하나를 제기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대규모 전쟁에서 읍성과 한양도성은 방어력이 없음을 몸소 체험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에 수시로 파견된 사신단 일행이 북경성과 산해관 등 방어력 높은 성곽을 수없이 봤다. 그럼에도 방어력 없는 조선의 읍성과 한양도성은 500년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일반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조선 사람 모두의 눈과 귀를 가린 거대담론의 잘못된 믿음이 있어서라는 추정 외엔 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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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사회 전체가 AI 시대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국제적으로 도태될 확률이 아주 높다는 이야기가 일상화한 요즘, 조선 읍성의 미스터리처럼 우리나라 사람 다수의 눈과 귀를 가려 변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담론의 잘못된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지 모른다. 없다고 너무 자신하지 말고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