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전쟁이 바꾸는 통화질서

[MT시평]전쟁이 바꾸는 통화질서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2026.03.18 02:41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Saadi)는 "인간은 한 몸의 지체(肢體)와 같아 한 부분이 고통받으면 다른 부분도 평온할 수 없다"고 노래했다. 이 시구는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에 전시된 페르시아 카펫에도 새겨져 있을 만큼 인류연대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가 서로 얽힌 하나의 몸이라면,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는 긴장은 그 몸의 신경을 건드리는 사건이다. 이란을 둘러싼 갈등이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라 세계 질서의 긴장으로 읽히는 이유이다.

과거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는 역사적으로 쉽게 정복되지 않는 나라였다. 기원전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시작된 페르시아 문명은 알렉산더, 아랍, 몽골의 침입을 거치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정복자는 있었지만 문명은 살아남았다. 자그로스 산맥과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란 고원은 천연의 요새였고, 무엇보다 페르시아는 수천 년 지속된 강력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문명국가였다. 역사적으로 정복자들조차 결국 페르시아의 언어와 행정 체계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페르시아를 두고 "정복은 당했지만 문명은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나라가 미국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베트남이다. 베트남 역시 외세의 지배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했지만 결국 승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진짜 후폭풍은 전쟁터가 아니라 금융질서에서 나타났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했고, 그 순간 브레튼우즈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금에 묶여 있던 달러는 그 이후 미국의 금융시장과 국채, 군사력에 의해 지탱되는 새로운 기축통화로 변모했다. 전쟁의 패배가 세계 금융 질서의 전환을 촉발한 셈이다.

여기서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가 나타난다. 세계의 기축통화를 공급하는 나라는 세계 경제를 위해 계속 유동성을 제공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그 통화의 신뢰는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 시기 미국은 전쟁 비용과 재정 확대 속에서 달러를 대량으로 공급했고, 결국 금과 달러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가 닉슨 쇼크였다. 당시의 위기는 금과 달러 사이의 긴장이었지만, 지금은 달러와 다극화된 금융질서 사이의 긴장에 가깝다.

지금의 국제 질서를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군사력과 금융시장을 가진 패권국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재정적자와 부채를 안고 있다. 중동에서 이어지는 긴장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라 에너지와 통화, 금융 질서가 얽힌 구조적 문제다. 여기에 관세전쟁과 지정학적 분열까지 더해지면서 다시 한번 통화질서의 변곡점이 나타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패턴은 종종 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베트남전이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을 앞당겼듯, 오늘의 중동 긴장과 경제 갈등은 미국 패권의 또 다른 시험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퇴조로 이어질지, 아니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미국 중심 질서로 이어질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계 질서의 큰 변화는 종종 전쟁의 그늘 속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전 BNK자산운용 대표
전 BNK자산운용 대표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