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때문에 의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던 목표 중의 하나인 '예방 의료'가 구현되고 있다. 질병이 발생하기도 전에 예측하고, 그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국가이다. 바로 한국의 보건의료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최근 네이처에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챗GPT와 동일한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1000개 이상 질병의 발생을 높은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Delphi-2M'이라는 이 모델은 단순히 '암 발생 확률이 몇 퍼센트'로 예측하는 수준이 아니다. 개인의 과거 진단 이력 전체를 입력하면, 향후 20년간 1000여개의 질병이 언제 찾아올지를 높은 정확도로 알려준다. 인공지능 덕분에 의료가 치료 중심에서, 예측과 예방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연구의 한계점은 오히려 한국이 예방 의료의 구현을 주도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Delphi-2M은 영국 바이오뱅크에 포함된 고작(?) 50만 명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자원자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편향이 있었고, 추적 기간도 20년 정도에 그친다. 연구팀은 이 한계를 스스로 밝히며 더 많은, 더 다양한, 더 오랜 데이터가 있었다면 인공지능이 훨씬 더 강력해졌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 데이터가 바로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에 있다. 한국의 전 국민 5100만 명을 대상으로 1989년부터 축적된 35년 간의 기록이다. 전 국민 의무 가입이므로 데이터의 편향도 없다. 더 나아가 2년마다 시행되는 국가건강검진 데이터를 포함하면 Delphi-2M 연구팀이 꿈꾸던 데이터를 이미 한국이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인공지능 분야에는 소위 '스케일링 법칙'이 있다. 데이터가 늘어날 수록 모델의 성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이 연구 대비 100배 이상 규모의 데이터로 학습시킨 AI의 성능은 훨씬 더 높을 것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은 한국의 보건의료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국가검진 체계의 혁신이다. 현재의 국가암검진은 나이로 대상자를 정한다. 같은 나이라도 질병 위험도는 천차만별이다. 기술의 발전을 고려하면, 더이상 효과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한국형 Delphi-2M 모델이 있다면 연령 대신 발병 위험도를 기준으로 검진 대상을 선별할 수 있다.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사람은 정해진 나이를 기다리지 않고, 조기 검진 대상이 된다. 반대로 위험 인자가 낮은 사람은 불필요한 검사를 줄일 수 있다. 즉, 진단율은 높이면서도, 의료 비용은 오히려 절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 한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구조적 문제 중 하나가 건강보험 재정이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보험료를 낼 인구는 줄어들지만, 의료가 필요한 인구는 늘고 있다. 결국 예방 의료로 전환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일례로 당뇨 환자 한 명이 평생 발생시키는 의료비는 비당뇨 환자의 3~4배에 달한다. 만약 당뇨 고위험군을 사전에 식별해 생활 습관 개입을 통해 당뇨 발생을 1년만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막대한 의료비 절감 효과가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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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의료 격차 해소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같은 위험 요인을 가진 사람이라도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는 질병을 늦게 발견하고, 예후도 나쁠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공단은 이미 전 국민의 의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Delphi-2M형 모델을 통해 지역별 고위험군을 식별하여, 지역 보건소나 의료기관과 연계해 검진을 권고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의료의 패러다임은 '예방 의료'로 전환하고 있다. 한국은 특유의 보건의료체계 덕분에 이러한 혁신을 선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전 국민 의료 데이터가 예방의료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남은 것은 이 방향으로 나가겠다는 결정뿐이다.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