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86% 디지털규제로 사업제약
선발기업 혁신이 규제 푼 경우 많으나
개척자에 대한 정부의 우대·지원 필요
스타트업의 86%가 디지털 규제로 사업 운영에 제약을 느낀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가 국내 스타트업과 생태계 관계자 500명을 조사한 결과다. 4곳 중 3곳 이상은 운영비의 5% 넘게 규제 준수에 쓰고 있었다. 규제가 혁신과 투자에 영향을 준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숫자로 확인된 셈이다.
규제가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AI와 데이터, 의료처럼 새로운 기술일수록 안전과 개인정보, 소비자 보호를 위한 규칙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규제의 유무가 아니라 품질이다. 특히 스타트업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새로운 시장의 규제를 처음 여는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는 것이다.
혁신은 대개 법보다 먼저 온다. 기존 법에 없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처음 시도한 기업은 규제기관과 협의하고,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고, 안전기준을 만들며 실증 데이터를 쌓아야 한다. 기술개발과 영업에 쓸 시간과 자본이 여기에 투입된다. 그러나 실증에 성공해 규제가 개선되면 그 결과는 모든 기업이 이용할 수 있는 시장의 규칙이 된다.
공유주방이 대표적이다. 2019년 위쿡은 하나의 주방에 여러 사업자가 영업신고를 할 수 없던 규제를 샌드박스 실증특례로 넘었다. 이후 유사 사업자는 이미 검증된 사례라는 이유로 간소화된 심의를 적용받았고, 식품위생법 개정으로 공유주방 운영업은 정식 제도가 됐다. 첫 기업의 실증이 후발기업의 규제비용을 줄인 것이다.
농어촌 빈집을 숙박시설로 재생하는 다자요도 비슷하다. 기존 농어촌민박의 거주요건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던 사업이 2020년 규제샌드박스에 들어왔다. 제한된 실증은 수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결국 법인·단체의 빈집 활용 민박을 허용하는 제도개선이 추진되고 있다. 기업과 정부가 함께한 실증이 새로운 정책 가능성을 확인한 사례다.
문제는 규제혁신의 비용이다. 첫 기업은 수년간 불확실성을 감수하며 시장 뿐 아니라 '규제의 가능성'까지 실증한다. 하지만 규제가 바뀌는 순간 그 결과는 모두의 것이 된다. 후발기업은 명확해진 규정과 축적된 행정 경험 위에서 출발한다. 규제개혁에는 성공했지만 규제를 개척한 기업의 선발자 이익은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이 생긴다.
기업의 연구개발을 정부가 지원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한 기업이 만든 지식과 기술의 편익은 사회로 확산되지만 그 기업이 모든 가치를 회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국가는 R&D 비용의 일부를 부담한다. 높은 초기비용과 위험, 혁신의 확산효과를 감안해 지원하는 것이 R&D라면, 새로운 제도의 가능성을 검증하는 실증도 일종의 '규제 R&D'라고 볼 수 있다.
독자들의 PICK!
최근 정부는 6개 부처에 흩어진 규제샌드박스를 원스톱으로 지원하고 법령정비도 특례기간 내 마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이제 '얼마나 빨리 규제를 풀 것인가'를 넘어 '누가 규제를 여는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까지 고민할 때다.
가칭 '규제개척자 제도'를 제안한다. 실증 결과가 법령 개정이나 규제기준 마련에 기여했다면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규제개척기업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독점권이나 진입장벽을 주자는 것이 아니다. 실증비용의 일부 보전, 후속 사업화와 정책금융, 공공조달, 해외진출 등에 우대하고 제도화 과정에서 기존 투자와 사업이 불리해지지 않도록 지원하자는 것이다. 정부와 규제기관이 실증에서 정식 시장진입까지 함께하는 '샌드박스 졸업기업' 지원도 필요하다.
시장의 위험은 기업이 져야 한다. 실패한 사업까지 정부가 보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기업의 혁신이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그 결과를 정부와 산업 전체가 활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규제를 배우는 데 든 사회적 비용까지 첫 기업에게만 맡기는 것이 과연 공정하고 효율적인지 물어야 한다.
혁신가는 새로운 기술과 제품만이 아니라 때로는 존재하지 않던 시장의 규칙까지 만든다. 새로운 길을 낸 기업이 손해보는 나라에서는 누구도 선뜻 길을 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규제혁신의 다음 단계는 규제를 개척하는 비용을 사회가 함께 부담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