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예향의 고장 서산 충민공(忠愍公) 류사(柳泗) 행적 본받아야

[기고]예향의 고장 서산 충민공(忠愍公) 류사(柳泗) 행적 본받아야

뉴스1 제공
2021.03.01 11:10

서산향토문화연구소 류영동 부소장

서산향토문화연구소 류영동 부소장© 뉴스1
서산향토문화연구소 류영동 부소장© 뉴스1

(서산=뉴스1) = 서산은 과거부터 충효예(忠孝禮)사상이 투철한 예향(禮鄕)의 고장이다.

국가에는 충성하고 부모에는 효도해야 한다는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어린이나 어른이나 모든 시민이 투철한 호국사상으로 국가가 위기를 당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친 위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병자호란 당시 37세의 젊은 나이로 장열히 전사한 충북 괴산 군수충민공(忠愍公) 류사(柳泗)에 대한 행적을 조사하고,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복되고 길한 일(상서로운)이 일어날 조짐을 지닌 의미의 서산(瑞山)은 서해로 열린 지리적 여건에 따라 대중국 교역의 중심지로, 21세기 환 황해권 시대의 핵심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통시대 서산지역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 중에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충의를 바탕으로 침략군에 맞서 싸웠던 서산 출신 사족의 활동 중 문화류씨 가문의 류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1일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이 중국 심양에 모여 청 태종 지휘 하에 다음날(임진왜란 후 44년, 정묘호란 후 9년) 조선 침략을 강행했다. 병자호란이 발생한 것이다.

급기야 조선 인조와 조정은 청군에 의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결국 남한산성에서 본격적인 저항 작전이 전개됐다.

적에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근왕병을 모았는데 각 도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오던 관군들은 남한산성에 이르기도 전에 패하는 등 설상가상의 상황이 연출됐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가 이끄는 8000여 명의 근왕병이 험천( 險川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서 패하면서 충청 각지에서 원병을 끌고 왔던 이성현감 김홍익과 남포현감 이경 등이 순절했다. 이 전투에서 서산 출신 류사와 이원길도 순절했다.

이렇듯 일본과 청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민생이 파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지역의 사족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분연히 일어섰다. 가족과 개인의 안녕과 이익보다 나라외 민족의 안위를 먼저 고민하는 경세가(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의 자세를 바탕으로 살신성인을 실천했던 것이다.

‘충’이란 글자는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의 합성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움을 의미한다. 성(誠)은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의 합성어로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드시 책임진다(成)는 의미이다. 따라서 ‘충성’이란 좌우로 마음의 흔들림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국가, 군주, 부모 등)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이고 충성심은 그런 마음을 말한다.

충과 더불어 짝을 이루는 효(孝)는 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고 공경(恭敬)한 마음으로 모신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어 늙으신 부모님(老)을 자식(子)이 업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사회에서 부모에 대한 효는 임금에 대한 충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충과 효는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됐다.

충민공 류사는 문무 차별이 심했던 조선사회에서 목숨을 담보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 온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순국하고 말았다. 전쟁 당시 보인 그의 생애와 활동이 지니는 가치가 큰 만큼 역사적 및 현재적 의미 역시 결코 작지 않다.

서산의 인물 류사가 살아나 우리 사회의 오늘과 내일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분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온 음덕으로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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