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미래를 찾는 긴 여정-리버럴리스트의 매니페스토](8)한 세대가 지나고 있다

"국가나 정치도 계절에 따라, 나이에 맞게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봄옷으로는 무더운 여름을 견딜 수 없고 여름옷으로는 추운 겨울을 넘길 수 없다. 소년기에 입었던 옷으로 청년기를 지낼 수 없고 청년기 옷으로 장년기와 노년기에 생활할 수 없다. 국가나 정치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정치가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정치제도도 상황과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고쳐져야 올바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이제 갓 독립을 선언한 국가의 정치제도는 새로운 국가로서의 기능을 행사하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경제성장을 급속하게 이룩해야 할 단계에서는 국가제도도 여기에 맞게 마련돼야 한다. 냉전시대의 국가제도나 정치구조는 글로벌 시대에 맞을 수가 없다.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한 지배세력이 권력유지의 관점에서만 제도를 마련하게 되면 잘못 입은 옷이 된다. 우리나라의 국가제도나 정치구조도 시대에 뒤쳐진 낡은 옷을 입고 있는지 살펴 볼 때가 됐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후 3년 간 미 군정기를 지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그 후 국가체제 형성기(1948년~1960년), 산업화 통치기(1961년~1987년), 민주화 정치기(1988년~2008년)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건국 당시 우리나라는 냉전체제 속 동서갈등의 시대 상황에서 신생 독립국가로서의 역사적인 의미에 부응해야 했다. 그리고 국민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국가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이런 요건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동서 냉전체제에서 모스크바로부터 전개됐던 한반도 적화 야욕을 막는 일이 시급했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자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반공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반공을 위한 권위주의 체제’가 대두됐다. 특히 1950년 북한군의 반민족적인 기습 남침은 이승만-이기붕의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국민이 염원한 민주주의는 멀어지면서 민주화의 주장이 열기를 띌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반공적 권위주의의 집권 세력과 여기에 맞서는 민주화의 저항세력 사이에 치열한 대결이 빚어지게 됐다.
마침내 1960년 4월 19일 대학생이 주도했던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민주당의 장면 정권을 거쳐서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이후 군사 권위주의에 의한 산업화 통치기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산업화에 의한 국력 신장과 북한의 남침 차단이 국정의 기본이 됐다. 또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이 우선적으로 추진됐다. 정부는 반공체제의 강화, 경제발전의 우선적 추진, 국가제도의 체계화에 진력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비롯한 연속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고 단기간 내에 경제성장을 이룩해 최저 빈곤국가에서 벗어나 중진국가로 올라서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기적’을 달성했다. 우리나라 산업현장 어디를 가도 당시 이룩했던 역사적 주춧돌과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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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시기의 경제발전은 ‘위로부터의 발전’이었으며 ‘정부에 의한 동원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로 인해 관료와 재벌의 유착관계가 형성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민주주의적 공화체제를 확립하려는 민주화 세력의 도전도 줄기차게 전개됐다. 이 가운데 일반국민은 정치와 경제적 변화에 따른 사회적 소외를 느끼게 되고 노동세력은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펼쳤다. 민주화 세력은 지식인-노동계-종교계로 이어지는 광범한 연대영역을 확보하게 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10·26 사태로 제5공화국이 등장했다.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의 구현’을 내걸고 더 한층 강화된 군사권위주의적 통치를 실시했다. 그 시기는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의 정상성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통치체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사회체제도 강압적 성격이 강했고 국민적인 합의에 따른 법 제도의 형성이나 통합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권위주의체제에서 보여줬던 한계성이 한층 더 심화돼 군부 세력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제도가 지속됐다.
6월 항쟁을 거쳐 민주화의 정치기(1988년~2008년)에서는 1988년 노태우정부, 1993년 김영삼정부, 1998년의 김대중정부, 2003년의 노무현정부가 이어졌다. 이 기간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 정부가 수립되고 민주사회 지향이 기본적인 성격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민주공화제 사회 정착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난관에 직면했다.
노태우정부는 비핵화의 선언과 ‘북방외교’의 추진으로 소련 중국과 수교를 맺었고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도 이룩했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이 요구했던 민주화의 욕구에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정치체제로서는 적지 않는 한계를 보여줬다.
김영삼정부는 ‘문민정부’를 내걸고 ‘신한국창조’를 국정 목표로 삼았다. 비민주적인 제도를 전면 개혁하는데 힘을 쏟겠다고 공약했다. 집권초기에는 공직자윤리법 개정, ‘하나회’ 해체, 이인모 등 비전향 장기수의 북한 이송,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 등 개혁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해 외한위기를 맞게 됐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김대중정부는 외환위기 극복, 신자유주의 이행,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발전을 위해 힘을 모았다. 대북관계를 유화적으로 접근했으며 외환위기의 극복을 위해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등 IMF체제 극복을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국 사회는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명예퇴직으로 중산층 가정이 몰락하는 등 신자유주의의 심각한 피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노무현정부는 ‘참여정부’라고 불렸으며 ‘국민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정부’를 지향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경제성과의 부진과 청년실업·비정규직 급증, 부동산 가격 폭등 등으로 서민 경제가 장기간 침체하는 상황에 처했다. 노무현정권이 지향했던 개혁적 열망과 현실 상황 사이에 큰 격차가 생겼고 그 때문에 적지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됐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뜨겁게 분출했던 시기에 정치권은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외형적 제도로만 응답했다. 민주화 투사들은 민주화의 시대적 상황을 새롭게 조성해야 했던 시기에 정치적 지위까지 점유했으나 형식적 제도에만 만족한 채 시대적 적실성을 지닌 민주화 이론과 실천을 담보한 내용을 마련하지 못했다. 민주화와 민주화 이후의 상황 전개에 대한 이론적인 인식은 물론이고 구체적인 실천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구호로서의 민주화와 염원 속의 민주국가는 본질적 괴리 현상을 빚게 됐다.
정권교체가 이뤄져서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가 이어졌다. 국민들은 많은 것이 달라지기를 기대했지만 뚜렷한 응답은 나오지 않았다. 많은 국민들은 뭔가 갑갑함을 느끼고 있다. 빠른 변화에 올바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에 고착된 채 정체된 상황에 무기력한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과제는 무엇이며 정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