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미래를 찾는 긴 여정-리버럴리스트의 매니페스토](9)한계적 상황과 시대적 과제-배경

"비례대표를 없애고 국회의원 정원을 줄이는 대신 국회의원 300명 중 100명 정도를 추첨을 통해 돌아가면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비례대표 선정 관련 논란의 소지도 없앨 수 있고 국민들이 국회가 왜 저렇게 돌아가는 지 직접 경험할 수 있고 정치가 대중에게 좀더 다가가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선거 정국'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우던 중 한 재선 국회의원이 평소 아이디어 차원에서 가지고 있던 생각을 풀어놨다. 선거가 대의 민주주의의 통로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이대로라면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후 꺼낸 이야기다.
국민이 직접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 대신 불특정 다수가 돌아가면서 국회의원을 '해 먹는' 추첨이라니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으로 들릴 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등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정치 선진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의회 구성을 추첨제와 결합시키자는 제안이 논의돼 왔다.
현대 정치학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로버트 달 예일대 교수는 연방과 주, 지역 단위의 의제에 따라 약 1000여명을 무작위로 선출해 의회의 자문위원회로 둘 것을 제안했고 서덜랜드는 영국 하원과 상원을 각각 추첨 의회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슈미트는 덴마크 의회에 미니 덴마크라고 불리는 전자 상원을 두고 1년 임기로 7만명을 추첨해서 구성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근대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 선거제가 대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선거로 선출한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이 오히려 대중을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역설, 즉 선거의 비합리성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초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는 누구나 선거에 나가 선출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돼 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자원을 동원하는 데 유리한 특정 계층 위주로 대표자가 구성되기 쉽다. 이에 따라 성별이나 세대, 학력, 직업 등의 대표성이 왜곡되고 국민의 대의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렵다.
이에 비해 추첨은 제약 요소와 무관하게 선출직의 기회를 보다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더구나 다양한 계층과 세대, 직업 등을 반영할 수 있어 대표성을 제고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추첨으로 이뤄진 대표자 집단과 이른바 표본집단인 전체 국민과의 유사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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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 당장 우리나라에서 추첨제를 도입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선거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볍게 볼 수 없고 추첨의 방법과 대상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첨제를 사용한 고대 아테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정의 기본원칙을 "다스리고 다스림을 번갈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우리 정치제도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는 지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총선을 앞두고 투표장에서 누가 국민의 선택을 받을 지 벌써부터 정치권이 들썩이고 있다.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달라'고 대통령까지 나서며 선거가 마치 민주주의의 전부인냥 호도되는 모습이 우려스럽다.
누가 정치를 하는가란 물음에 '진실한 사람' 대신 국민이란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