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여있는 예산은 막힌 혈관 격, 불용액 100조 원 시대 진단과 해법은

고여있는 예산은 막힌 혈관 격, 불용액 100조 원 시대 진단과 해법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2026.04.23 14:13

[특별기고]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④새로운 대한민국, 6.3 지방선거부터

이광재 전 강원지사.
이광재 전 강원지사.

대한민국에서 매년 되풀이되는 연말 풍경 중 하나가 보도블록 교체 공사다. 남은 예산을 다 쓰지 못하면 다음 해 예산이 깎일까 봐 멀쩡한 도로를 파헤치는 이 광경이야말로 국가 재정 효율성의 민낯을 보여준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눈에 보이는 보도블록이 아니다. 장부상에만 남겨진 채 경제 현장으로 흘러가지 못하는 거대한 예산의 고임 현상, 즉 '불용(不用)'이다.

불용액이란 국가가 예산을 편성해 놓고도 사업 계획 차질, 낙찰 차액, 혹은 고의적인 집행 지연 등으로 인해 실제로 사용하지 못한 돈을 말한다. 2023 회계연도 기준 중앙정부 불용액은 약 45조 원대이며, 지방의 이월액·잉여금 등을 포함한 전체 규모는 100조 원 내외로 추정된다는 분석도 있다. 단순히 남는 돈이 아니다. 적기 투입됐다면 경제성장률을 0.5~1%포인트 이상 끌어올렸을, '잠든 경제적 기회'다.

예산이 불용되는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그 기저에는 행정 편의주의와 경직된 재정 시스템이 있다. 대표적 요소들을 살펴보자.

첫째, 과도한 예산 확보 경쟁과 부실한 사업 설계다. 공무원 조직에서 예산 확보는 곧 부서의 힘으로 평가받는다. 일단 예산을 따고 보자는 식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정작 집행 단계에서 인허가 문제나 보상 지연 등에 가로막혀 돈을 쓰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

둘째, 경직된 예산 전용 및 이용 제도다. 경제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한 번 정해진 비목을 변경하기 어렵게 만든 규제는 불용을 양산한다. A 사업에서는 돈이 남고 B 사업은 돈이 모자라도 부처 간, 항목 간 장벽 때문에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분하지 못한다.

셋째, 사후 평가와 인사 시스템의 부조화다. 예산을 낭비하면 징계를 받지만, 예산을 쓰지 않고 남기는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관료적 보신주의가 '무조건적 불집행'을 유도한다. 재정학에서 말하는 '예산의 경직성(Budget Rigidity)' 이론이 한국 행정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불용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재정 정책의 '적시성(Timeliness)'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확장 재정을 편성하더라도, 현장에서 예산이 집행되지 않으면 그 효과는 반감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왜곡의 대표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회비용의 상실이다. 불용된 100조 원이 첨단 산업 R&D(연구개발)나 취약계층 주거 지원에 투자됐다면 창출됐을 부가가치는 막대하다. 이는 국민 경제 입장에서는 명백한 자원 배분의 실패다.

둘째, 국가 재정 건전성에 착시가 발생한다. 불용액이 발생하면 겉으로는 재정 수지가 개선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발생한 '가짜 건전성'이다. 실제 국가 채무는 국채 발행을 통해 늘려놓고, 정작 그 돈은 금고에 쌓아둬 이자 부담만 가중시키는 비효율이 발생한다.

셋째, 지방정부의 소극 행정이다.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중앙정부의 교부금에 의존하다 보니, 스스로 수익 사업을 발굴하기보다 받은 예산을 관리하는 데만 급급하다. 이는 지역 소멸 위기 속에서도 지역 맞춤형 투자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독소 조항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불용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출의 유연성'과 '성과 책임'을 결합한 혁신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영국의 지출 검토(Spending Review)가 대표적이다. 영국은 다년도 예산 계획을 통해 사업의 연속성을 보장하면서도, 성과가 미진한 사업에 대해서는 연중 수시로 예산을 회수해 유망 사업으로 재배치하는 유연한 시스템을 가동한다.

싱가포르의 성과 기반 환류 시스템도 모범 사례로 꼽힌다. 싱가포르는 불용액이 발생하는 부서에 대해 다음 해 예산을 단순히 깎는 것이 아니라, 불용 원인을 데이터 기반으로 분석해 예산 편성과 사업 설계에 반영하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디지털 예산 관리 시스템(IFMIS)을 도입하는 나라들도 많다. 실시간으로 예산 집행률을 모니터링하고, 집행 지연이 예상되는 지점을 AI(인공지능)가 사전에 포착해 경고하는 지능형 시스템이다.

대한민국의 불용액 문제를 해결하고 재정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책이 필요하다.

첫째, 예산 집행 가시화 시스템(Digital Twin Budgeting) 도입이다. AI 심사 시스템을 집행 단계까지 확장해야 한다. 모든 사업의 집행 과정을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해 어디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하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예산을 즉각 재배분하는 '실시간 재정 운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둘째, 불용액의 '국민 투자 전환' 제도화다. 연말에 남는 불용액을 단순히 국고로 회수하거나 다음 해로 넘기지 말고, 이를 '국가 자산 투자 펀드'로 즉시 전입시켜야 한다. 예산은 '소비'되지 못하면 '투자'로라도 변환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불용액이 많으면 패널티를 줘야 한다.

셋째, 성과 책임제의 실질화다. 예산을 100% 집행하는 것보다 '목표한 성과를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달성했는가'를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무리하게 돈을 쓰게 만드는 현재의 구조를 깨고, 예산을 절감하면서도 성과를 낸 공무원과 지자체에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절감액 공유제'를 도입해야 한다.

재정 개혁의 핵심은 세금을 더 걷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예산이 한 푼의 낭비 없이 제때, 필요한 곳에 흐르게 하는 것이다. 100조 원에 달하는 불용액과 이월액은 대한민국 경제의 막힌 혈관과 같다. 이 고인 돈을 AI 기술과 유연한 제도로 뚫어주기만 해도 우리 경제는 새로운 도약의 동력을 얻을 것이다.

예산은 관료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의 피땀 어린 자산이다. '돈 쓰는 국가'에서 '돈 버는 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가진 돈도 제대로 못 쓰는 무능'에서 벗어나야 한다.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지능형 재정 시스템을 통해 불용액을 제로화하고, 그 가치를 국민의 실질 소득으로 환원할 때 대한민국의 재정 민주주의는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특히 지방정부부터 불용액을 줄여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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