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억누른 '6·10 만세운동'…학생운동·좌우합작에 더 강해졌다

일제가 억누른 '6·10 만세운동'…학생운동·좌우합작에 더 강해졌다

조성준 기자, 이정혁 기자, 정한결 기자
2026.06.1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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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 100주년]③

[편집자주] [편집자주]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거리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6·10 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히지만 오랫동안 '이념의 벽'에 가려 그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머니투데이는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경무국 사료를 심층 분석해 당시 항일투쟁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 왼쪽부터 박두종, 박하균, 이천진, 이선호, 이병립/사진제공=독립기념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 왼쪽부터 박두종, 박하균, 이천진, 이선호, 이병립/사진제공=독립기념관

1926년 6월10일 경성(현 서울)에서 벌어진 6·10 만세운동의 주역은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등 학생들이다. 사회주의·민족주의 인사들의 거사 직전 발각에도 학생 조직의 치밀하고 은밀한 준비로 만세운동이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중앙고보 출신 이선호, 연희전문 출신 권오상 등 학생 200여명을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했다. 특히 만세운동의 배후 조직 세력이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임을 알면서도 학생들에 의해서 벌어진 것으로 축소했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와 달리 만세운동은 전국의 학생운동을 촉발시켜 동맹휴교라는 결과를 낳았다. 6·10 만세운동은 사회주의·민족주의 계열의 '연합전선' 가능성을 보여줬고 이듬해 2월 '신간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경성에서 울려퍼진 학생들의 '만세'…전국으로 번져나가다
양림교를 건너는 시위대열 펜 일러스트.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다룬 영화 '이름없는 별들'/제공=국가보훈부
양림교를 건너는 시위대열 펜 일러스트.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다룬 영화 '이름없는 별들'/제공=국가보훈부

10일 머니투데이 특별취재팀이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확보한 조선총독부 문건 '조선에 있어서의 동맹휴교의 고찰'(1929년)에선 일제의 위기의식이 엿보인다. 일제는 1926년 이후 전국적으로 이뤄진 동맹휴교 현상의 원인과 결과 등을 세세히 기록하는 등 예의주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문건에 따르면 소화 2년(1927년) 하반기부터 소화 3년(1928년)에 걸쳐 동맹휴교가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1928년에만 전국적으로 37개교가 동맹휴교를 감행했다고 조선총독부는 파악했다.

총독부는 동맹휴교에 나선 학생들의 공통적인 요구를 일제의 '식민지 교육 반대' '군사 교육(교련) 반대' '교내 조선어 사용 보장' '조선인 교원 확보' '경찰의 학교 내 개입 반대' 등으로 정리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전국의 수십 개 학교에서 반복된 동맹휴교는 조선인 학생들의 일제를 향한 저항심을 축적시켰다. 이후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일어난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은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명명되며 전국적 학생운동으로 확산한다. 이때 참여한 학교는 전국 194개교, 참여 학생은 5만4000여명에 이른다. 1919년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평가된다.

역사학자들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이어진 전국적인 학생운동들의 시작도 6·10 만세운동이라고 입을 모은다.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인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6·10 만세운동으로 인해 많은 학생이 감옥에 가고, 학교에서 쫓겨났다"며 "이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학생들이 갖는 미안함과 동참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동맹휴교로 연결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6·10 만세운동이 없었다면 광주학생항일운동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6·10 만세운동이 뿌린 씨앗…좌우 합작 '신간회'로 피어나다
신간회(新幹會) 개요/그래픽=이지혜
신간회(新幹會) 개요/그래픽=이지혜

6·10 만세운동를 학생운동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만 독립운동 세력 내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연합'을 이뤄 민중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역사적 의의도 중요하다.

일제는 1926년 6월 5일 만세운동이 벌어지기 닷새 전 민족주의 계열인 천도교 중앙총부 본관을 습격해 6·10 만세운동에 사용될 수만장의 격문(檄文)을 확보했다. 이후 일제는 천도교와 힘을 합쳐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핵심 주동자 조선공산당 내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 권오설(權五卨)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일제의 사전적 대응으로 만세운동에 이들 '연합전선'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 세력은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을 보며 진영을 넘어선 독립운동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느꼈다. 이 움직임은 이듬해인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의 창설로 이어진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계열 인물 이상재와 사회주의 계열 홍명회 등을 중심으로 '민족 단일당'을 표방하며 손을 잡아 만든 항일 조직이다. 신간회는 한 때 전국 140여 개 지회에 회원 약 4만 명을 거느리는 등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 민족운동 단체로 성장했으며,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에는 진상조사단 파견과 민중대회 개최를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연대하기도 했다.

전명혁 동국대 연구교수는 "신간회는 사회주의 계열과 이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가 연대해서 만든 민족통일전선이었다"며 "1931년 5월 해산이 될 때까지 민족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 신간회의 발판이 6·10 만세운동에서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폭이 넓어지고 활발해졌는데, 6·10 만세운동이 1920년대 후반에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며 "6·10 만세운동에서 보여준 사회주의자·민족주의자가 연대하는 운동의 방향성이 이후 더 넓은 민중운동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식을 퍼뜨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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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준 기자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 국정원, 보훈부를 출입합니다. 외교·안보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쉽고 재미있게 현안을 전달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정혁 기자

안녕하세요. 건설부동산부 이정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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