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 100주년]⑥

"6·10 만세운동은 남과 북이 모두 버린 역사입니다."
황선건 6·10만세운동유족회장은 최근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남쪽에서는 사회주의 계열 운동이라는 이유로, 북측에서는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한 김일성의 정통성을 훼손한다는 논리로 외면 받았다는 주장이다. 황 회장은 "독립운동은 좌우가 없었다"라고 강조했다.
황 회장은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황정환 선생의 손자다. 중동학교 특과 3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황정환 선생은 22살의 나이로 종로구 숭인동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후 징역 1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황 회장은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제의 왜곡과 해방 이후 이념 대립 속에서 소외된 항일 운동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6·10 만세운동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으킨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했다. 1925년 창건된 조선공산당이 이념을 내세우지 않은 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절대적 해방'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으며, 중국 상해에 있던 김단야가 거사를 기획하고 국내의 권오설이 천도교 구파와 연합해 시위를 준비했다는 설명이다.

일제가 이를 단순 학생 운동으로 축소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만세운동을 기획한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6월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소리소문없이 옥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학생 11명에게는 '6·10만세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별도의 재판을 열어 만세운동을 학생 운동으로 축소·왜곡했다고 봤다.
황 회장은 "일제가 6·10 만세운동 확산을 두려워해 재판을 두 개로 나눴다"며 "기소된 학생 11명 중 6명이 사회주의 학생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으로, 6·10만세운동은 엄밀히 따지면 사회주의 계열이 일으킨 독립운동"이라고 했다.
황 회장은 6·10만세운동이 독립운동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에 사회주의 또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이라는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후대의 역사학자나 정치학자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갖다 붙인 명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이 무슨 좌우가 있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남북한 양측에서 6·10만세 운동의 주역들이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적 운동이라는 명목 아래 이념적 탄압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후손들은 연좌제에 걸려 취직이 안 되고 교육 혜택조차 받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에 처했다"고 말했다. 이어 "박래원 선생의 아들인 박명도씨는 서울대를 수석 졸업해 청와대까지 입성했지만 곧바로 쫓겨났다"며 "권오설 선생의 양자인 권대용씨는 고향인 안동에서 사회주의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대구로 이사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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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북한에서)6·10만세운동을 내세우면 자신들의 정통성이 훼손된다"며 "공산당을 북한과 연결 짓는데 북한에는 정작 공산당이 없고 노동당만 있다"고 했다.
현행 보훈 정책의 한계점도 지적했다. 일제 강점기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려면 그 흔적을 지워야 했는데, 현행 시스템상 독립운동가였음을 후손이 직접 입증해야 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하다는 것이다. 황 회장은 "나도 할아버지 사진이 없다"며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할 때 찍은 사진이 유일하다"고 밝혔다. 이어 "적어도 사실적 증명이 된 독립운동가에겐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황 회장은 유족들이 금전적인 혜택을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족들 나이가 80세에 달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혜택을 받겠나"라며 "후손들은 '레드 콤플렉스'에 따른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분들이 사회주의자가 아닌 항일 독립운동가였다는 것, 그 명예를 회복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