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와 여당에서 개헌이 논의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일 방송좌담회에서 “1987년도에 민주화, 독재정권 투쟁을 하다가 헌법을 개정한 뒤 세월이 흘러 디지털시대, 스마트시대가 됐다”며 “거기에 맞게 남녀동등권, 기후변화, 남북 관련 등 여러 문제에 대해 헌법을 손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올해 말이라는 시한도 제시했다. 개헌 특임장관이라 할 수 있는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23년 된 낡은, 유신헌법의 잔재가 남아 있는 헌법을 선진헌법으로 바꾸자”며 “개헌을 위해 가장 강력한 상대와 맞서겠다. 나는 다윗이고 나의 상대는 골리앗이다”라면서 개헌논의의 선봉에 서 있다.
그러나 세간의 반응은 싸늘하다. 국민은 관심이 없다. “웬 개헌?”이다. 왜 지금 헌법을 바꾸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국민의 무관심은 우리 헌정사에서 터득한 역사적 직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정치조직과 경제체제의 구성원리 등 국가운영의 근본을 정한 나라의 최고 규범이다. 헌법의 개정은 이러한 나라의 골간을 바꾸는 일이기에 그 절차가 몹시 엄격하다. 현행 헌법에서 개헌은 대통령이나 국회 재적의원의 과반수가 발의해 국회 재적의원의 2/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된 뒤 국민투표에서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확정된다. 법률 개정과 달리 사실상 국민의 전면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우리 헌법은 지금까지 9차례의 개정이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유신헌법, 5공헌법 등 무력과 권력을 앞세운 헌정사의 후퇴를 가져온 개헌이었다. 국민이 개입하여 국민이 바라는 바에 따라 이루어진 개헌은 4·19 혁명 후의 내각제 개헌과 1987년 6월 항쟁 뒤 현행 헌법을 탄생시킨 직선제 개헌 두 차례밖에 없다. 그리고 헌법이 독재자의 권력 유지장치가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 보장장치로서, 내가 내는 세금에서 대통령의 탄핵에 이르기까지 국민생활과 국가운영 전반에 실질적인 규범력을 행사한 것은 현행 헌법에 와서의 일이다. 그러니까 현행 헌법은 유신잔재가 남아 있는 23년 된 낡은 헌법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헌정사상 최장수 헌법이라고 해야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물론 현행 헌법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이 아니다. 5년 단임제와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 일부 기본권 조항들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 이재오 특임장관도 개헌의 핵심을 ‘한국형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라고 했다. 그러나 5년 단임에 다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국민이 아직은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다. 또 권력집중을 문제 삼으려면 현행 헌법의 틀 안에서 최대한의 분권정책을 실시하고 그것이 헌법적 한계로 인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을 때 국민에게 개헌을 호소하여야 한다. 그래야 분권화를 우리 사회의 절박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국민이 나서기 시작한다.
독자들의 PICK!
현행 헌법이 탄생한 과정을 되돌아보자.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선출하고 국가가 권력유지를 위한 폭력기구로 전락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난한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헌법은 그렇게 국민의 열망이 도도한 흐름으로 모여야 바뀌는 것이다. 국민은 아직은 헌법을 바꿀 의지가 없다.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은 이를 한마디로 요약한 바 있다. “국민의 열망이 없어 개헌 추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4년 중임제 원포인트 개헌 논의가 좌절한 근본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의 지난 3년의 국정운영과정은 분권화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오히려 지방에서 중앙으로, 국회에서 행정부로, 행정부에서도 대통령으로 권력을 더욱 집중해온 과정이었다. 그러니 국민이 청와대의 개헌논의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이다. 이재오 의원은 골리앗은 여성이 아니라며 박근혜 의원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했으니, 그 골리앗은 국민인가. 그러나 그 국민은 개헌해봐서 잘 아는데, 그리해서 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