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L]대학으로 간 '진보의 아이콘'…"법전을 흔들면 피가 흐른다 법 정신을 이해해야"

"가장 먼저 줄무늬 와이셔츠를 샀어요. 빨강, 파랑 등 색색깔로. 법원에 있을 때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고. 편한 옷을 입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교수가 되니 그런 자유로움이 너무 좋아요. 이제는 흰 와이셔츠는 입지도 않습니다(웃음)"
'진보의 아이콘' '법조계의 이단아' '순진한 원칙론자'
박시환 전 대법관(63·연수원 12기)을 부를 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만나보지 않고 듣기만 해도 깐깐한 열정이 느껴진다. 별명의 주인공 박 전 대법관을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4년 전 베일듯 빳빳한 카라에 흰 와이셔츠, 목 둘레에 딱 맞게 채워진 넥타이를 매고 퇴임사를 읽어내려갔던 그가 푸른 스트라이프 셔츠에 느슨한 넥타이를 매만지며 웃어보였다. '깐깐한 판사님'보다는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 "김밥에서 학교식당으로..새벽 3시까지 수업준비"
대법관이 아닌 교수로 불리는 그는 지난 2011년11월 임기를 마치자마자 이듬해 1월 이곳 전임교수로 부임했다. 과거 고위 법조인들이 퇴임 후 변호사로 전업을 하거나, 석좌교수로 강단에 섰던 관례에 비춰보면 파격에 가까운 행보다.
"사실 전임교수는 생각도 전혀 안했어요. 강의에, 논문에 겁이나 못하겠더라고요. 도와줄테니 걱정말라는 학교 설득에 오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대학원장까지 시키더군요. 그래도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재미있어요."
대법관 시절 그는 '김밥맨'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말이면 집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 두 줄을 사다가 끼니를 때우며 일을 해 얻은 별칭이다. 그 성실함은 교수가 돼서도 바뀌지 않았다. 삼시세끼 가운데 두끼를 학교식당에서 해결하며 수업을 준비했다.
"남들은 일주일에 3시간 수업이라고 하면 편하다고 하는데 전 바빠요. 판례별로 인용된 논문들, 조문들, 교과서를 찾아보고 하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어요. 한 번은 수업준비를 하다 시계를 봤는데 새벽 3시인거야. 그런데 또 수업시간에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늘 부족해요."
2012년부터 몸에 밴 일상이다. 아침 6시에 눈을 떠 7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선다. 집에서 인천 인하대까지 1시간30분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수업준비에 강의를 하다보면 밤 10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퇴근해서도 책을 놓을 수 없다. 다음 수업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학기를, 일년을 지내다보니 주변 교수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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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른 교수들이 이제와서 그래요. 대법관 출신이 교수로 온다고 해 점잖게 양복입고 와서 좀 앉아 있다 가고 할 줄 알았는데 열심히 한다고. 나중엔 꽤 평가가 좋았대요"라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렇게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벌써 4년이다. 그래도 후회는 남는다.
"교수들이 그러는데 신임 교수는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얘기하고, 중간쯤 되면 하고 싶은 얘기만 하다가 고참이 되면 학생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한대요. 근데 내가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얘기하는 상태였던거야. 학생들이 알아듣기 좋게 했어야 했는데 처음 강의할 때는 아무래도 조절이 잘 안됐던거 같아요. 한 학기 수업을 해보니까 그게 보이더라고. 그래도 요즘에는 좀 편해졌어요."
◇ "항상 따라다녔던 '달라야 한다'는 부채감…힘들었죠"
지금은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할까, 어떤 얘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하는 그지만, 법원에 있던 시절, 그의 행보 하나하나는 곧 사법개혁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곤 했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였던 지난 2003년 박 교수는 사표를 냈다. 법조계 안팎에서 사법개혁 요구가 빗발치던 때다. 당시 대법관 선출 과정에서 개혁의 흔적을 찾지 못한 그는 항의의 의미로 법복을 벗었다. 눈물로 제출한 그의 사표는 이듬해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과 최초의 여성 대법관 선출을 이끄는 도화선이 됐다. 지금 세상은 이를 '4차 사법파동'이라 부른다.
법복을 처음 입었을 때부터 싸움의 시작이었다. 1985년 인천지법 판사로 첫 부임 하자마자 반정부시위로 재판에 넘겨진 학생 11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로 부임 6개월만에 그는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좌천됐다. 당시 서태영 서울지법 판사가 이와 관련해 인사 유감이라는 글을 언론에 기고했다가 그 역시 울산지원으로 좌천됐다. 이 사건은 사법사상 초유의 대법원장 탄핵 사건의 빌미가 됐다.
그로부터 8년 뒤, 1993년에는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등 서울민사지법 소장판사 40여명과 사법개혁을 촉구하며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들의 주장에 변호사 단체와 사법연수생들까지 동참하면서 결국 김덕주 대밥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3차 사법파동이다.
그러던 그가 2005년 대법관으로 선출됐다. 주변의 기대가 컸다. '달라야 한다'는 기대는 곧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가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을 터다.
"대법원의 다양성, 사법개혁이 강조되면서 남들과는 다른 경로로 대법관 자리에 오른거죠. 너는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기대가 컸어요. (이런 기대를)너무 의식해도 안되겠고, 의식을 안할 수도 없고, 그래서 부담이 컸어요. 열심히 해도 하는 일 없다는 얘기도 들리고. 거기 왜 들어갔느냐는 얘기를 들을 수는 없잖아요. 안그래도 일이 죽을만큼 많은데 이런 신경까지 써야 하니 너무 힘들었죠."
항상 부채감이 있었다. 그는 대법원에서의 6년을 "지긋지긋했다"고 회고했다. 애증이 담긴 표현이다. 대법관 시절 그는 10건 가운데 2건 꼴로 소수자 편에 서서 다수와 싸웠다. 당시 소수자 편에서 목소리를 냈던 김영란 김지형 이홍훈 전수안 전 대법관과 함께 '독수리 오형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14명의 대법관 중 5명.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터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었고, 그래서 그에게 대법관 6년의 시간은 싸움의 시간이었다. 그는 퇴임사에서 싸움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못한다면 법원은 다수자들의, 그들만의 법원에 머무르게 되고, 바깥으로 밀려난 자들은 버려진 사람으로 남아 하소연할 데 없는 아픔을 품고 잊혀진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사법부 독립…인사시스템 뜯어고쳐야
그가 분노했던 사건의 면면을 살펴보면 결국 '사법 독립과 개혁'으로 수렴된다. 그는 법관 개개인의 자율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다. 사회 어느 집단보다도 보수적이라고 평가되는 곳이 사법부지만,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곳 역시 사법부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법관이 통제되고 길들여지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재판 밖에 못해요. 사회가 바뀔 수가 없죠. 사형제를 폐지한 선진국들 중 50% 이상 국민이 찬성해서 이뤄진 나라는 없어요. 어느 정도 여론이 형성됐을 때 법원이 먼저 나서 사회 변화를 이룬거에요. 행정부, 의회는 절대 못하는 일이죠. 법원이니까, 독립된 사법부니까 할 수 있는 거에요. 다양한 목소리가 살아나야 정권을 견제하는 앞서가는 재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박 교수는 자유로워야 할 판사들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로 인사 시스템을 꼽았다. 지금같은 승진 체계 속에서 판사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독립적인 판결을 내리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지난 3차, 4차 사법파동의 시작도 결국은 '인사'의 문제였다.
"사법부만이 유일하게 지시, 감독, 결제가 없는 독립 관청이죠. 고과 평정을 해도 재판내용으로 하지 않아요. 그 이유를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을 보면 판사에게는 승진의 개념이 없어요. 지방법원이든 고등법원이든 판사는 다 같은 판사지 높낮이가 없다는 얘기에요. 누군가 인사권한을 갖고 있으면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판사도 보통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탓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시스템을 고쳐야 하는 겁니다."
◇ "사회 곳곳에 법 정신이 스며들어야…사시로는 힘들다"
학교 안팎에서는 로스쿨과 사법시험을 두고 한창 논란이다. 학교 현장에서 직접 학생들을 만나는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로스쿨은 '금수저'들만 다니는 현대판 음서제일까.
"사시 문제는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에요. 법이라는 게 소송을 할 때만 쓰는게 아니라 생활에 스며들어 있어야 해요. 법조문이 아니라 원칙과 법정신에 따라 모든 분야에 법이 스며들어 작동하는 게 법치의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거죠. 그런데 사시로는 힘들어요."
지금의 사시는 소송전문가, 관료를 키우기 위한 제도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소송이나 분쟁이 발생하기 전에 법을 실생활에서 녹여낼 수 있는 분야별 전문가를 키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짜 법률전문가를 만들어야죠. 각 분야의 전문지식과 경험, 거기에 법이 추가돼 분야별 전문가가 나오는 거에요. 한국의 조선산업, 건축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 분야의 이론과 실무, 거기에 법지식까지 있는 전문가가 몇명이나 되겠어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고. 각 분야의 법 전문가를 키워 처음 거래가 형성될 때부터 법이 적용이 되서 적합한 거래가 형성되도록 해야죠. 사시 시스템에서 진짜전문가는 나올 수가 없어요. 다들 법밖에 모르니까."
사시가 '기회의 사다리'라는 주장에도 의견을 달리했다. 사시존치론자들은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지만 갈 수 있는 로스쿨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법은 긴 세월동안 소중하게 쌓아온 인류의 자산이에요. 법 원칙들을 깊이 이해하고 함부로 가벼이 여기지 마세요. 법전을 흔들면 그 속의 법조문과 법원칙 하나하나를 만들기 위해 흘린 땀과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그 원칙들을 깊이 이해하고, 잘 실현시킬 수 있는 공부를 해야해요. 그러려면 서울 신림동 학원에 틀어박혀 있어선 안돼요. 대학졸업이라는 문턱이 필요한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할텐데, 법이 책만 보고, 조문만 잘 외운다고 되는 걸까요."
현행 로스쿨 제도의 문제점은 '사법시험화 된 변호사 자격시험'에서 파생된 부분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교육은 로스쿨에서 시키고, 시험은 사시처럼 보는게 문제에요. 의사자격시험을 생각해봐요. 학교를 졸업하면 자격시험을 보고, 인턴 레지던트 등 현장에서 전문교육을 또 시키잖아요. 로스쿨도 그렇게 되야한다고 봐요. 시험합격률이 낮으니 다들 시험공부만 하느라 정작 특성화 교육이 불가능한 상황이에요. 로스쿨의 취지와 맞지가 않죠."
시험은 자격시험화 하고, 실무 경험을 통해 분야별 전문성을 키울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지금도 끊임없는 통제 위협 속에서 사법권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법조계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두려워하지 말라. 손해를 볼 각오를 해라. 네가 가지고 있는 책임과 가치는 훨씬 더 무한한 것이다."
[Who is?]
박시환 교수는 1953년 경남 김해 출신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천지법 판사,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2005년에는 대법원 대법관으로 임용돼 지난 2011년 임기를 마치고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