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는 제가 3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얼굴도 잘 몰라요."
19일 오전 11시쯤, 장기영씨는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 마련된 묘비 하나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고 한참 동안 묘비 사진을 찍었다. 1960년 4월19일 서울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총탄을 맞고 숨진 아버지의 묘비였다.
장씨는 "그 때 아버지 나이가 42살, 정말 젊은 나이였다"며 "어머니는 33살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7남매를 키우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식된 도리로서 효도 한 번 못해본 것이 많이 아쉽다"며 "매년 찾아올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4·19혁명 제63주년을 맞이한 이날 국립4·19민주묘지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재 권력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찾아왔다. 현재 국립4·19민주묘지에는 당시 희생자, 부상자, 공로자 등 총 562기가 안장돼있다.
김선화씨는 경기 의정부시에서 이곳까지 직접 찾아왔다. 김씨는 "당시 어린 학생들이 민주주의 운동을 했던 게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며 "직접적인 친인척은 없지만 감사함을 표하고 싶어 찾아오게 됐다. 요즘 나라가 많이 어수선한데 편안해지고 번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드렸다"고 말했다.

무연고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40년 넘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작가 김낙영씨는 이곳에 안장된 5개 무연고 묘비 앞에 떡과 술을 올려 놓고 묵념을 했다. 김씨는 "40년 전 선배들과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며 "다른 묘비엔 유족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5개 묘비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그 때부터 매년 찾아와서 인사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만 해도 이곳이 하얀 소복을 입고 묵념 드리러 온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며 "그런데 이제는 시간이 흘러 그 분들도 많이 돌아가셨고 그만큼 찾아오는 사람들도 줄어든 것 같다. 다음 세대에도 희생자들을 기리는 문화가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교수였던 고 김성식씨 묘비 앞에는 20명이 넘는 제자들이 찾아왔다. 김씨는 1960년도 4·19 혁명 당시 교수 시위를 주동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제자 이모씨는 "이제 고령의 나이가 됐지만 당시 교수님이 알려주신 자유와 진리, 정의의 가치를 기억하고 있다"며 "매년 이렇게 찾아와 인사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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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주열 열사의 묘지 앞에도 시민들이 찾아와 묵념을 했다. 김주열 열사는 1960년 3월15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오른쪽 눈에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이후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이는 곧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이날 이곳을 찾은 김모씨 역시 김주열 열사의 묘비 앞에 앉아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는 "김주열 열사야말로 4·19 혁명을 빛낸 사람 중 한 명"이라며 "우리는 이런 분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오전 10시30분 '자유의 꽃이 피련다'라는 주제로 제63주년 4·19 혁명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4·19 혁명은 불의와 부정에 항거한 국민 혁명"이라고 정의하면서 "꽃다운 젊은 나이의 학생과 시민의 희생으로 대민은 자유의 꽃을 피우고 자유를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