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12월 20일.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당시 23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사건은 사형 집행일 127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세광은 1974년 8월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어내려가던 중 연단을 향해 달려가며 총을 쐈다.

문세광이 쏜 총탄은 박 대통령이 아닌 귀빈석에 앉은 육영수 여사를 향했다. 육 여사는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이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았으나 사망했다. 당시 상황은 라디오와 TV로 생중계 됐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를 노린 23세 청년은 객석에 있던 공무원의 발에 걸려 넘어져 현장에서 체포됐다.
범인은 일본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 문세광이었다. 그는 미제 38구경 권총에 실탄 5발을 장전한 채 식장에 들어왔고, 일본어를 구사하며 VIP로 위장해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1972년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 포섭된 것으로 전해진다.

문세광은 단독 범행을 주장했지만 조사당국은 사건 발생 불과 이틀 만인 8월17일 "북괴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한 암살 시도 사건"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감식계장이었던 고(故) 이건우 경감이 24시간 대기 명령을 받고 현장에 가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발표된 결과였다.
문세광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고, 수사 결과 발표 일주일 만인 8월24일 문세광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13가지 죄목으로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됐다. 이어 9월12일 내란목적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6개 죄목으로 기소됐다.
이 사건 수사에는 검사 출신인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세광 사건에 관한 외교문서가 공개된 다음날인 2005년 1월21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그는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 출연해 당시 자신이 문세광의 자백을 끌어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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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19일 문세광은 1심에서 사형이 선고돼 즉각 항소했으나 11월2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됐으며, 12월17일 대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돼 사형이 확정됐다.
12월20일 오전 7시30분.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서 문세광의 사형이 집행됐다. 사건 발생 127일, 형 확정 뒤 3일 만의 초고속 집행이었다.
이날 오전 7시3분쯤 잠에서 막 깨자마자 사형장으로 끌려온 문세광은 "사형이 진행되는 거냐"라고 묻고는 이후 1~2분간 고개를 떨구고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흐느꼈고, 이후 몹시 긴장하고 격한 어조로 약 10분간 일본어로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사죄와 함께 어머니와 아내 등 가족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문세광은 "나는 바보였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에게 미안하다", "재일동포로서 무엇하나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가 사형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다", "조총련에 속았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들에게 속을 일도 없었을 것" 등의 유언을 남겼다.
가족에게는 "어머니께 불효해 죄송하다", "나이가 아직 어린 아내는 재혼하여 새로운 생을 걷기를 바란다", "아들은 형님이 맡아주셨으면 한다", "아내에게 될 수 있으면 육 여사 묘소를 참배하도록 말해달라" 등의 말을 남기고 생을 마쳤다.
그러나 현행범으로 체포된 후 사형된 문세광이 범인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고 이건우 경감이 1989년 8월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문세광이 육 여사를 숨지게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다.
사건 당시 문세광은 5발이 장착되는 권총을 사용했고, 한 발이 권총 약실에 남아 있어 총 4발을 발사한 것으로 결론났다. 문세광에 대한 대법원 사형 판결문에 따르면 문세광이 쏜 4번째 총탄은 육 여사에게 맞았다. 반면 이 경감은 4번째 총탄이 천장을 맞췄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세광이 당일 승차 입장 카드·비표도 없이 출입한 점, 권총을 국내 반입한 점, 위조여권으로 비자를 받은 점, 일본과 한국의 수사 결과가 다른 점도 진범 의혹의 불씨가 됐다.
한국 측은 이 사건을 북한, 조총련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한 반면 일본 측은 문세광의 저격은 단독 범행이라 봤다. 1974년 8월 29일 일본 외무부에는 "일본 경시청은 육영수 여사의 저격을 '과실 살인'이라 본다. 한국 수사당국이 짜맞추기 수사를 하고 무리하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한국 정부의 수사 발표에 대한 불만이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1월20일 문세광 사건 관련 외교 문서가 공개되면서 이 사건으로 인해 한일 관계가 수교 10년 만에 단절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일본 측의 사건 공동정범에 대한 수사 부진과 조총련에 대한 단속 문제가 갈등 요인으로 떠오르면서다.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국교 단절 방침까지 밝히고 미국에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미국은 "한일관계가 깨지면 한국 방위도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며 원만한 해결을 주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일본 측이 조총련 규제에 대한 약속을 친서가 아닌 구두로 전달하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했고, 이후 방한한 일본 특사가 조총련 규제를 약속, 이 내용을 메모로 작성해 양국이 교환하는 것으로 갈등은 일단락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