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정권 치하에서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 전 경감이 사망했다. 향년 88세.
이근안은 지난 25일 서울 한 요양병원에서 사망해 현재 서울 동대문구 동부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된 상태다. 발인은 오는 27일 오전 5시20분으로 예정됐다.
1938년 인천에서 태어난 이근안은 1970년 순경으로 입직해 1972년 8월부터 대공 업무를 담당했다. 이근안은 간첩 검거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 경감 승진까지 특진을 거듭했고, 표창도 16차례나 받았다. 1986년엔 전두환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실적 비결은 고문을 앞세운 강압 수사였다. '관절 뽑기', '전기 고문', '물 고문' 등 수법도 다양했다. 당시 경찰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공안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2011년 별세한 고(故) 김근태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역시 1985년 9월4일 '민청련 결성' 사건으로 구속됐을 당시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으로부터 전기 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근안이 관여한 공안 사건 가운데 일부는 재심에서 조작 정황이 인정돼 무죄가 선고됐다. 이근안의 가혹 행위에 못 이겨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해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납북어부 정규용씨도 2014년 38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이근안은 민주화 직후인 1988년 민고문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우편으로 사표를 내고 잠적했다. 한때는 그가 해외로 도피했다거나 사망했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12년 만인 1999년 돌연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자수하면서 "재판을 받은 동료들의 형량이 비교적 가벼운 것을 보고 마음이 안정되고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말해 비판을 받았다.
이근안은 이듬해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을 확정받은 뒤 2006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그는 종교 활동을 통해 여러 차례 과거를 반성한다는 뜻을 밝혀왔지만, 사과 진정성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다.
이근안은 2012년 12월 14일 서울 성동구 한 식당에서 열린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기념회에서 "당시 간첩과 사상범을 잡는 것은 애국이었다"며 "애국이 아니면 누가 목숨을 내놓고 일했겠느냐"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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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월이 지나 정치형태가 바뀌니까 내가 역적이 되고 이 멍에를 고스란히 지고 살아가고 있다"며 "그 바람에 가족들도 거지가 되다시피 살았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