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적 타선과 신바람 야구를 이끈 불멸의 4할타자 백인천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산적 타선과 신바람 야구를 이끈 불멸의 4할타자 백인천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2026.08.1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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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은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 타율 4할1푼2리를 기록한 불멸의 4할 타자였다. 1990년 LG 트윈스의 초대 사령탑을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신바람 야구의 서막을 열었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에는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에서 퍼시픽 리그 수위 타자가 되어 산적 타선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백인천 전 감독. /사진=뉴시스
백인천 전 감독. /사진=뉴시스

지난 15일 광복절에 세상을 떠난 백인천(향년 83세)은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큰 족적을 남긴 야구인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그에 대한 부고 기사가 쏟아진 이유다.

한국 프로야구의 원년인 1982년에 타격왕에 올랐을 때 그의 타율은 4할1푼2리였다. 지금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탄생한 기록 가운데 그의 타율 4할은 가장 깨기 힘든 불멸의 기록으로 불린다.

감독으로서 백인천은 1990년 LG 트윈스의 초대 사령탑을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서울 연고 팀으로는 최초의 우승을 달성한 LG 트윈스는 당시 화끈한 공격 야구로 프로야구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6월 초까지 꼴찌 팀이었지만 후반기 대반격에 성공해 우승을 거둔 LG 트윈스의 역전 신화에는 백인천 감독의 역할이 컸다. '프로 선수라는 의식을 항상 잊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그의 야구 철학은 모래알 같던 LG 선수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짜임새 있는 타선과 기동력의 LG는 1990년에 '신바람 야구'의 서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후 삼성(1996~1997)과 롯데(2002~2003)에서 지휘봉을 잡았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채 야구 팬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사라졌다.

백인천의 야구인생은 2003년 롯데 감독 시절 성적 부진과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 때문에 경질된 뒤 내리막 길을 걸었다. 그는 국민타자 이승엽이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뒤 일본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세 차례 뇌줄중으로 건강이 악화됐다. 설상가상 격으로 사기 피해까지 당해 경제적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지난 15일 충남 천안 단국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인천 전 감독의 빈소. /사진=뉴스1
지난 15일 충남 천안 단국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인천 전 감독의 빈소. /사진=뉴스1

야구인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의 최전성기는 일본 프로야구에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경동고 재학시절부터 일본 야구계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던 대형 타자였다.

1960년 경동고는 한국 고교야구 팀으로는 최초로 일본 원정경기를 펼쳤다.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펼쳐진 니혼다이니(日大二) 고교와의 경기에서 4번타자로 출전했던 백인천은 3점 홈런을 터트렸다. 2차 대전 이후 고교생으로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홈런을 기록한 것은 그가 두 번째라 일본 언론에서는 백인천을 크게 주목했다.

2년 뒤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니혼햄 파이터스의 전신)에 입단한 백인천은 재일동포 장훈과 함께 한솥밥을 먹었다. 1963년부터 도에이에서 포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던 그는 1966년 외야수로 전향한 뒤 이듬해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기량이 급성장했다.

와일드한 플레이와 오기로 똘똘 뭉친 '난폭자 군단' 도에이에서도 백인천은 기가 세고 강한 남자로 통했다. 그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일본에서 팬들의 야유와 심판의 부당한 판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1970년 판정 시비때문에 주심을 넘어 트린 뒤 구타하기도 했다. 그가 구타한 주심은 왕년의 프로 복서출신이어서 이 사건은 일본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일본 언론들은 '조센진(조선인)이 일본 심판을 구타했다'는 보도를 했고 급기야 주심은 백인천을 고소했다. 하지만 일본프로야구기구(NPB) 총재는 사무국으로 백인천과 주심을 불러 화해를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백인천은 주심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백인천은 이 사건으로 30만 엔의 벌금과 5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감독과 선수로 연을 맺었던 백인천 전 감독(왼쪽)과 이승엽. /사진=이승엽 SNS 갈무리
삼성 라이온즈 시절 감독과 선수로 연을 맺었던 백인천 전 감독(왼쪽)과 이승엽. /사진=이승엽 SNS 갈무리

1972년 최초로 3할 타율(3할1푼5리)의 고지에 오른 백인천은 3년 뒤에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로 이적해 퍼시픽 리그 수위 타자가 됐다.

당시 다이헤이요는 퍼시픽리그 팀 타율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타력이 막강한 팀이었다. 다이헤이요는 일본 프로야구의 '스몰 볼'에서 벗어나 화끈한 공격 야구를 지향했다. 여기에 다른 팀에서 이적해 온 개성이 강한 선수들의 호쾌한 스윙은 작전 야구에 싫증났던 팬들의 갈증을 해소해줬다.

그래서 다이헤이요에 붙은 별칭은 '산적(山賊) 타선'이었다. 다이헤이요는 타순에 상관없이 어디서든 홈런과 장타가 터져 나와 상대 투수로부터 사정 없이 대량득점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주로 5번 타자로 기용된 백인천은 4번 타자 도이 마사히로와 함께 산적 타선의 중심 타자였다.

백인천 감독은 지난 1990년 인터뷰를 통해 "프로야구 선수들은 겨울철에 고통을 겪어야 성장한다"며 "슬라이딩을 해야 할 때 하지 않거나 무기력한 투구를 하는 선수에게는 경고를 한다"고 했다.

'스스로 노력하는 일을 사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그의 좌우명 '노력자애(努力自愛)'와 같은 맥락의 얘기다. 그가 이끈 다이헤이요의 산적 타선과 LG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의 성공도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직업의식과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시작됐다.

이종성 교수.
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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