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은행·자본시장·기업가정신

[기고]은행·자본시장·기업가정신

신보성 한국증권연구원 연구위원
2004.10.22 12:21

[기고]은행·자본시장·기업가정신

은행은 과거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핵심주역이었다. 경제개발계획 하에 정부가 육성할 산업을 정하고 나면, 이들 산업의 성장에 필요한 자금은 은행이 도맡아서 제공한 것이다. 정부 주도 하에 은행이 자금을 지원하는 이러한 일사불란한 체제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경제발전 초기에는 모든 영역이 한결같이 낙후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백지상태에서는 수익성 높은 투자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으며, 따라서 어떤 곳에 투자하는 것이 효율적인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정부가 투자대상을 정하여 실행하기만 하면 성공을 거두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축적이 미약하여 투자에 필요한 재원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사실상 은행예금에 대한 지급을 보장함으로써 가계자금이 은행에 집중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 하에 대규모 자금을 조달한 은행은 정부가 지정한 산업에다 적극적으로 자금을 제공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한강의 기적을 낳았던 한국의 성공 스토리다.

그러면 앞으로도 은행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재연할 수 있을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 이유는 우리 경제가 이미 과거와는 다른 상황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과거와 달리 국내 자본이 상당 정도 축적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투자도 자유화되면서 국내에서 흘러 다니는 자본의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반면 우리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경제발전 초기에 비해 성장기회가 크게 줄어들었다. 투자에 필요한 자금규모가 늘어난 것과는 정반대로, 수익성 있는 성장기회는 급격히 축소된 것이다. 그런데 수익성 있는 성장기회가 줄었다는 말은 어떤 곳에 투자하는 것이 효율적인지를 판단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투자대상의 성공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태에서는 정부나 은행처럼 소수의 엘리트들이 투자대상을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 이유는 불확실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정보가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되어야만 실패할 확률을 줄일 수 있는데, 소수에게 결정권이 집중될 경우에는 충분한 정보가 반영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자본시장의 가치가 드러난다.

자본시장에서는 상호 경쟁하는 수많은 투자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정보가 생산되어 가격에 반영된다. 따라서 기업은 자본시장이 발신하는 가격신호에 의존하여 의사결정을 할 경우, 실패할 확률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시장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불확실성이 높은 혁신산업과 모험산업이 더 빨리 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최근 우리 경제가 저성장국면에 진입함에 따라 불확실성이 높은 성장기회도 과감히 사업화하려는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벌써 몇년째 시중에 자금이 넘쳐나는데도 투자와 창업은 끝모를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정보 발신을 통해 투자의 실패확률을 낮추는 자본시장이 낙후되어 있는 한 저성장시대에 기업가정신을 외쳐대는 것은 한낱 초혼가(招魂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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