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은행판도 감상법
은행업은 덩치싸움이다. 큰 놈이 시장을 주도한다는 얘기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위험의 분산필요성이다. 은행이 예금자에게 원리금 지불 약속을 지키려면 가능한 한 여러 기업에 대출을 분산시킴으로써 위험을 낮추어야 한다. 이러한 대출 분산은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를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둘째, 은행의 위험흡수 기능은 규모가 커야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은행은 주로 확정금리 상품을 제공하며, 변동금리 상품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원금은 보장한다. 고객에게 돌아갈 시장가치 변동위험을 은행이 대신 흡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험흡수 능력은 자기자본의 크기, 즉 규모가 클수록 늘어난다. 은행이 덩치를 키워야 하는
세 번째 근거는 막대한 고정비 부담에 있다. 최근의 은행업은 대규모 IT투자를 통해 점차 장치산업화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에 수반되는 고정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덩치를 키워야 한다.
결국 은행업에서는 규모가 핵심 경쟁력의 원천이며, 따라서 합병을 통해 규모를 늘릴 경우 단 기간에 리딩컴퍼니가 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국민은행이다. 2001년 11월, 국민은행은 주택은행과의 합병을 통해 일거에 30%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게 되었다. 덩치 면에서 필적할 상대가 없어진 것이다.
이처럼 독보적인 시장지배력을 가진 은행이 등장하고 나면, 선도자와 추종자의 관계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강력한 시장지배력을 갖춘 은행이 가격을 선도하고 다른 은행들도 이를 따르는 암묵적 담합의 개연성이 커진 것이다. 통합 국민은행 출범 이후, 이전과는 달리 시장금리가 속락하는 와중에도 예금금리가 신속히 떨어지지 않은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은행권의 수수료 인상 역시 이러한 암묵적 담합을 만들어내는 시장구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다른 은행들은 왜 선도은행을 따르는 것인가. 선도은행의 행태를 추수함으로써 밀월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선도은행에 대항하여 가격경쟁을 펼치기란 힘에 부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협조하는 편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밀월관계가 단기적으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일 수 있지만 여타 은행 입장에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독자적인 전략을 추진하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선도은행이 태도를 돌변하여 언제 자신들의 시장을 공략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이처럼 불안한 교착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선도은행에 맞먹는 덩치를 키우는 길 밖에 없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합병 이후 하나은행의 서울은행 인수, 신한은행의 조흥은행 인수가 차례로 이루어진 배경에는 이러한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여타 은행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규모 격차는 여전히 극복하기 힘들어 보였으며, 따라서 선도은행으로서 국민은행의 지위가 위협받을 가능성도 크지 않았다. 정작 국민은행의 지위를 겨냥한 포성은 의외의 곳에서 울려 퍼졌다. 씨티은행의 한미은행 인수가 그것이다. 세계 최대의 상업은행이 국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국내 시장점유비가 각각 1.7%, 6.1%에 불과한 씨티은행 서울지점과 한미은행의 합병이 가져오는 충격은 그래서 단순한 숫자 이상의 것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바야흐로 지난 3년간의 껄끄러웠던 밀월관계가 끝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