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이회장의 '검토'와 '거절' 사이
1월20일 오후 2시50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사가인 서울 한남동 승지원.
이 회장이 탄 승용차를 선두로 강신호 전경련 회장, 김준성 이수화학 명예회장,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 등이 줄지어 차를 타고 들어갔다. 차기회장직 수락을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 방문한 전경련 회장단과 이 회장의 대화는 1시간 남짓 이어진 4시쯤 끝났다.
기자들에게 이회장과 전경련 회장단의 대화내용이 공개된 건 5시30분쯤. 현명관 부회장은 '결과부터 말해달라'는 부탁을 뒤로하고 장황하게 참석자 모두의 대화를 전했다. 내용은 '회장단은 거듭 부탁했고 이회장은 거듭 고사했다'는 것.
'그게 다냐'는 질문에 현 부회장은 "원로들이 거의 강권하다시피 부탁을 하니까 이 회장이 말미에 '신중히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했다"며 "완전히 결론이 난 건 아니다"라고 여지를 남겼다.
현 부회장의 표현대로라면 '이회장이 잘라서 거절한 건 아니며 신중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각 삼성그룹측의 반응은 전혀 다르게 나왔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고사한 걸로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고사 보다 조금 더 단호한 표현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과 같은 수식어도 빼달라고 부탁했다. '정중한 거절'쯤이 적합하겠다는 얘기도 했다.
결국 '신중히 생각해 봅시다'라는 이 회장의 마지막 발언에 대해 전경련은 '검토'라는 해석을, 삼성 구조본은 '정중한 거절'이라는 해석을 단 셈이다.
삼성 구조본 관계자의 얘기가 이회장의 진의와 가깝다고 보면, 아무래도 전경련의 해석은 '기대치'를 기준으로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이 날 전경련이라는 단체와 재계 일반의 거리감도 '검토'와 '거절'사이의 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졌다. 여러 회장들이 얘기한 것 처럼 '상황은 절박하고 이회장 외에 대안도 없는' 현실이 날씨만큼 추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