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은행, '행렬 애벌레' 되려는가

[광화문]은행, '행렬 애벌레' 되려는가

홍찬선 기자
2005.08.18 11:35

유충의 일종인 행렬 애벌레는 맨 앞의 애벌레를 무조건 뒤따르는 특성을 갖고 있다. 눈을 반쯤 감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앞에 있는 애벌레의 뒤꽁무니만 뒤쫓아간다. 프랑스의 곤충학자인 파브르는 행렬 애벌레 한무리를 잡은 뒤 선두 애벌레를 커다란 화분의 가장자리를 돌게 했다. 바로 옆에는 싱싱한 나뭇잎이 있었지만 행렬 애벌레들은 3~4일 동안 계속 앞에 있는 애벌레 뒤를 따라 화분 가장자리를 돌다가 모두 굶어죽고 말았다.

머리를 돌리면 전후좌우를 모두 볼 수 있고 손익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볼 때 행렬 애벌레는 미련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사람도 행렬 애벌레처럼 무작정 앞에 있는 사람을 뒤쫓다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작정 남의 뒤를 쫓다 실패

외환위기 이후에 가계를 대상으로 아파트(주택)담보대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은행들이 하나의 예다. IMF 위기 전에 ‘재벌은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믿고 재벌에 과다하게 대출했다가 엄청난 부실채권을 떠안고 문을 닫거나 다른 은행에 합병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제는 앞다퉈 아파트(주택)담보 대출을 늘리고 있다. 주택담보대출은 올 상반기에만 13조원이나 늘어나 지난 6월말 현재 293조3777억원에 이르렀다. 사상 처음으로 기업대출(287조6445억원)을 5조7332억원이나 웃돌았다.

아직은 부동산 가격이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어 담보대출에서 이익을 내고 있다. 하지만 “하늘이 두쪽나도 부동산 값은 잡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다짐과 “헌법처럼 바꾸기 어려운 부동산 대책을 내놓겠다”는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의 각오를 담아 오는 31일 참여정부의 ‘부동산 종합대책’이 나온 뒤에는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고 또다시 엄청난 부실채권을 시달릴 수 있는 리스크를 배제하기 어렵다. 벌써 서울 강남에서는 아파트 거래가 뚝 끊기고 가격도 하락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이런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시대에 채권투자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연기금과 생명보험 등도 은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과 한미 금리역전 및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유가로 인한 물가상승 우려 등으로 시중금리가 오르는 추세여서 채권투자에서 엄청난 평가손이 우려되고 있다. 3년짜리 국고채 수익률은 작년말 3.28%에서 현재 4.27%로 올라 있다.

주택담보대출과 채권에 주력하다 주식 및 PEF 높은 수익 잃는 잘못 저질러

행렬 애벌레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은행과 생보 및 연기금 등은 주식투자나 PEF투자에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수익을 잃는 기회비용을 치르고 있다. 종합주가지수는 올 들어서만 20% 이상 올랐다. 종목별로는 100% 이상 오른 종목도 수두룩하다. 수익률이 30%를 넘는 배당주펀드와 적립식펀드도 많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는 불과 2년만에 2조원이 넘는 평가익을 올려 수익률이 150%를 넘고 있다. 제일은행을 인수했던 뉴브리지캐피탈은 5년여만에 1조1500억원(230%)의 차익을 실현했다. 한미은행을 샀던 칼라일과 진로를 인수했던 골드만삭스 등도 7000억~1조원의 차익을 남겼다.

은행 생보 등은 이런 엄청난 차익을 애써 ‘신포도’로 치부하려고 한다. 배고픈 여우가 잘익은 포도를 따먹으려고 했지만 너무 높게 달려 있어 먹을 수 없게 되자 ‘저 포도는 시고 맛도 없을 것’이라고 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려고 하는 ‘토종 PEF'들의 자금 가뭄으로 이어지고 있다. 출범을 서두르고 있는 한 PEF 대표는 “자산이 230조원에 이르는 국민은행이나 90조원을 넘는 삼성생명은 PEF에 자금을 대지 않는 것에 매우 실망했다”고 지적한다. “겉으로는 토종 PEF를 육성해 한국 기업과 금융회사의 구조조정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산의 0.1~0.2%도 리스크 관리를 내세우며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행과 생보 등 금융회사의 기본적인 기능은 리스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관리함으로써 수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개인이 부담할 수 없는 리스크를 모아 풀(Pool)로 만듦으로서 리스크를 줄이는 대신, 안전에만 머물러 있을 때보다 높은 이익을 얻는 것이다. 중국 닷컴기업에 투자해 수조원대의 평가이익을 얻고 있는 손정의 회장이 대표적인 예다.

게다가 리스크는 피하려고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주택담보대출과 채권투자에 주력하는 것은 안전에 의존하면서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직무유기일 수 있다. 부동산과 채권 자체의 가격 하락 위험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알렉산더는 손으로 풀기가 불가능한 ‘고디안 매듭’을 칼로 자른 뒤 대제국을 건설하는 지배자가 되었다. 콜럼부스는 달걀 밑바닥을 깨뜨려 세우는 발상의 전환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은행과 생보 등이 여우의 신포도와 행렬 애벌레의 행태에서 벗어나 고디안 매듭과 콜럼부스의 달걀을 해결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절실한 때다.

빈부격차 키우는 평준화·부동산 정책

보이지 않는 규제, 멍드는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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