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대해부]
-창사 이래 최대 위기
-中 '궈차오'에 밀리고 '따이공' 이탈… 성장 공식 붕괴

한국 증시에서 '황제주'로 불리며 17년 연속 성장의 신화를 썼던 LG생활건강이 마이너리그로 강등될 처지다. 중국 소비자의 변심, 보따리상(따이공)의 실종, 그리고 국내 시장에서의 브랜드 노후화까지 3중고를 견뎌내지 못하는 중이다. 지난해 4분기에는 700억원이 넘는 대규모 영업적자와 2500억원대의 순손실이라는 실적쇼크를 내놨다.
그간 LG생활건강(247,000원 ▲2,000 +0.82%)을 지탱해 온 '중국-면세-럭셔리'라는 승리 방정식이 무너졌음이 숫자로 증명된 것이다. 증권가는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며 경고음을 울렸다.
28일 발표된 LG생활건강의 2025년 4분기 잠정 실적은 어닝 쇼크를 넘어섰다는 게 투자자들의 반응이다. 매출액은 1조 4728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5% 감소했고, 영업손실 727억 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컨센서스(시장 전망치)였던 42억 원 흑자를 크게 밑돌았고, 영업이익률은 -4.9%로 추락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실적의 추세다. 2025년 1분기만 해도 LG생활건강은 1424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2분기 548억원, 3분기 462억원으로 이익 체력이 급격히 소진되더니 4분기에는 기어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불과 1년 만에 분기이익 2000억원 이상이 증발한 셈이다.
특히 순손실 2517억원이라는 대규모 적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영업 활동에서의 손실을 넘어 장부상 자산 가치를 털어내는 빅배스가 단행됐음을 의미한다.
위기의 진앙지는 중국이다. 과거 LG생활건강의 '후(Whoo)'는 중국 여성들에게 '황실의 화장품'으로 불리며 없어서 못 파는 귀한 몸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국 시장의 판도는 뒤집혔다.궈차오(애국소비)의 공습도 문제다. 중국 MZ세대를 중심으로 자국 제품을 선호하는 '궈차오' 열풍이 거세다. 프로야(Proya), 위노나(Winona) 등 중국 로컬 브랜드(C-뷰티)들은 한국 화장품 못지않은 품질에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잠식했다.
이로 인해 "한국 화장품은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후'와 '숨'의 설 자리는 좁아졌다. 메리츠증권에 따르면 4분기 LG생활건강의 중국 매출은 전년 대비 17%나 급감했다. 여기에 중국 경제 둔화로 인한 소비 양극화도 직격탄이 됐다. 초고가 브랜드(에르메스, 샤넬)는 살아남았고, 초저가 로컬 브랜드는 약진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낀 매스티지(대중적 명품) 포지션의 한국 럭셔리 브랜드들은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지갑 닫은 중산층의 외면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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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생활건강의 고수익 비결이었던 면세점 채널의 부진도 치명타를 미쳤다. 과거 LG생활건강은 면세점에 물건만 쌓아두면 기업형 보따리상(따이공)들이 현금을 들고 와 쓸어가는 구조였다. 마케팅 비용 없이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핵심 파이프라인이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단속 강화와 면세 시장의 구조적 변화로 따이공들이 자취를 감췄다.
키움증권은 4분기 LG생활건강의 면세 매출이 전년 대비 55% 급감했다고 추정했다. 따이공들 입장에서도 중국 내에서 한국 화장품 인기가 시들해지니, 마진이 남지 않는 LG생건 제품을 매입할 유인이 사라진 것이다. 손쉽게 수익을 내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해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안방인 국내 시장에서도 LG생활건강의 지배력은 약화되고 있다. 뷰티 시장의 주도권이 백화점에서 CJ올리브영으로, 대기업 브랜드에서 인디 브랜드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지금 2030 세대는 '후'나 '오휘'를 찾지 않는다. 대신 조선미녀, 마녀공장, 브이티(VT) 등 트렌디하고 기능성이 강조된 인디 브랜드를 선택한다.
LG생활건강 브랜드는 엄마 화장품이라는 올드한 브랜드 이미지가 굳어졌다. 회사는 뒤늦게 더마코스메틱(CNP 등)을 강화하고 온라인 채널 비중을 늘리고 있지만, 날렵하게 트렌드를 읽어내는 인디 브랜드들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조직의 대응이 늦다는 지적이다.
4분기 순손실 2517억 원은 재무적 관점에서 '빅배스' 성격이 짙다는 게 증권가의 판단이다. 경영진이 2025년 실적 방어를 포기하는 대신, 장부상 부실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 인수한 미국 에이본(Avon) 등 해외 법인의 영업권 가치를 대폭 깎아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메리츠증권이 추산한 가치삭감액은 1860억원 가량이고 팔리지 않고 쌓여있는 악성 재고들을 폐기 손실로 처리했을 수도 있다. 여기에 일회성인 퇴직자 인건비도 반영됐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2026년 실적 개선을 위한 포석이다. 비용을 미리 털어냈으니 기저 효과로 인해 숫자가 좋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동안 회사가 누적된 잠재 부실을 안고 있었음을 인정한 셈이기도 하다.
LG생활건강은 중국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북미시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키움증권에 따르면 4분기 북미 매출은 전년대비 31% 성장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아마존, 틱톡 샵, 코스트코 입점 등 채널 확장 전략이 먹혀들고 있다. 문제는 수익성이다. 미국은 마케팅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드는 시장이다. 매출은 늘었지만, 마케팅비를 쏟아붓다 보니 당분간은 적자를 면치 못하는 구조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있다.
조소정 키움증권 연구원은 얼마전 보고서에서 "현재는 수익성보다 매출 확대를 우선하는 기조라 비용 부담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미 시장이 수익을 내는 효자로 거듭나기까진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증권가의 시각은 냉정하다. 당분간 상황은 비관적이라는 것이다. 화장품 사업 구조조정이 완료되기 전까지 실적 기대감을 낮춰야 한다. 현재 PER(주가수익비율)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신임 CEO의 전략 방향성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관망해야 한다는 것이 컨센서스다.
주가가 고점 대비 1/3 수준으로 하락해 밸류에이션 매력이 있다는 '저가 매수론'도 있으나 이익 추정치가 계속 하향 조정되는 상황에서 저 PER은 착시일 뿐이라는 '저평가의 함정' 경고가 더 우세하다. 투자자 입장에서 4분기 적자는 '바닥 신호'일 수도, 지하실의 서막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