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등 제조업 피해 비롯 제약, 인쇄·출판, 발효식품 등 산업 전반 타격

역대 최대 규모의 지진과 쓰나미에 원전 사고까지 덮친 일본은 지금 많은 것이 '없다'. 지진·쓰나미의 직접적인 피해와 방사능 공포에 생수, 연료 등 생필품이 동났지만 부족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전력난에 따른 계획정전에 산업 전반이 직격타를 맞아 많은 제품들의 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전력 부족해 전기차 얘기도 못꺼낸다"-자동차 딜러
계획정전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는 곳은 제조업이다. 이미 부품업체들의 생산 차질에 글로벌 산업에까지 피해가 확산됐지만 일본 현지 업체의 하소연을 들어보면 안타까운 모습이 이만저만 아니다.
특히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부품난에 일부 생산을 중단하는 등 현실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지만 또다른 예기치 못한 악재를 겪고 있다. 최근의 고유가 환경에선 전기자동차와 하이브리드카가 호조를 보여야겠지만 계획정전 영향에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
토요타와 혼다, 닛산 등 주요 업체들은 미국 등 해외에 생산거점이 분산돼 실제 지진 피해는 예상보다 작았지만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 생산 거점은 일본 현지에 있어 큰 타격을 입었다. 산케이신문은 이같은 상황을 두고 전기차 사업의 여명기 속에서 전기차를 미래의 수익 기둥으로 삼으려 했던 업체들의 의지가 꺾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 자동차 딜러는 "요즘 도쿄에서는 남들이 보는데 전기가 드는 휴대용 게임기나 MP3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으면 눈초리를 받는다"며 "이런 상황에서 고객들에게 전기차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계획정전 탓에 예상된 수혜를 놓친 곳은 또 있다. 장비 업체들은 지진 피해 복구에 따른 제품 수요 급증을 예상했지만 계획정전에 오히려 생산 감소 상황을 맞았다. 주물을 고온에서 녹이고 또다시 식히는 작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작업에는 전기가 필수적이다.
로봇 부품 업체 고이즈미알루미늄 관계자는 "작업 재개 전망이 서지 않고 정말 무력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일부 업체들이 정전을 피해 심야에서 새벽까지 공장을 가동시켰지만 직원들에게 야간 근무 수당을 줘야 해 비용 상승으로 오히려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
인쇄·출판 업계도 계획정전으로 시름에 빠졌다. 대형 제지회사들이 정상적으로 공장을 돌리지 못하자 업계에선 종이가 부족해 책을 만들지 못할 정도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연간 약 800만톤이 생산되는 일본 인쇄용지 시장에서 현재 150만톤의 생산이 중단됐다. 신문용지도 50만톤이 생산중단됐다.
독자들의 PICK!
종이뿐만 아니라 잉크도 문제다. 잉크의 원료가 되는 화학제품의 생산이 정체를 빚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신문 폐지를 표백하는 과산화수소도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이유들로 최근 일본 잡지 234종 중 16종이 예정된 발매를 취소했다. 인기 잡지인 주간소년챔프도 발매가 8일이나 연기되는 일이 벌어졌다.
◇"정전되면 무균 유지 어려워, 안전한 약 만들 수 없다"-제약회사 임원
꾸준히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제품들의 생산에 계획정전은 치명적이다. 그래서 요즘 일본 제약회사들은 멸균이 필수적인 주사제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슈퍼마켓에서는 발효 식품인 요구르트를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낫또도 품귀현상이다.
한 제약회사 임원은 "생산과정에서 정전이 되면 무균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며 "이대로는 안전한 의약품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전으로 온도 유지를 못해 약품에 영향이 미치면 생산되는 것은 거의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특히 무균실에서 만드는 주사제는 정전이 발생하면 무균상태가 손상돼 멸균 작업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토와약품은 주사제 생산을 4월 말까지 보류했다. 사와이약품은 주사제 생산 공장의 작업 시간을 야간과 휴일로 옮기기로 했다.
또 고온 살균과 발효 과정이 필수적인 요구르트와 낫토, 우유의 생산도 크게 줄었다. 일본 최대 낫토 생산업체 타가노후즈의 최근 생산량은 지진 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맥주업체들의 고민도 깊다. 동북지역 공장과 저장탱크가 직접적인 지진 피해를 입은데 더해 계획정전으로 발효와 숙성 작업에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정전일은 사실상 조업이 불가능한 날로 계획정전 지역 공장들은 대부분 지진 전 보관 맥주를 용기에 포장하는 작업에만 그치고 있다.
특히 맥주 수요가 최고조에 달하는 여름에 계획정전 역시 가장 잦을 것이라는 우려가 맥주업체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산토리는 전국 4개 공장 중 2개 공장이 계획정전 지역에 있어 계획정전이 지진보다 더 큰 피해를 주고 있다고 토로했다. 또 아사히는 보통 6월 이후 실시하는 24시간 공장 풀가동을 2개월 앞당겨 일찌감치 '여름 대란'을 대비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