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칠레의 분노는 50원이 전부가 아니다

[MT리포트]칠레의 분노는 50원이 전부가 아니다

강민수 기자
2019.10.28 17:21

교통비 월 소득 20% … 잦은 공공요금 인상 불씨 <br> GDP 2만달러 달하지만 … 빈부격차는 최대 <br> '남미의 오아시스' 이면에 숨겨진 불평등

23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시위대가 방화를 벌이는 모습. /사진=AFP
23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시위대가 방화를 벌이는 모습. /사진=AFP

"세계가 '진짜' 칠레를 볼 수 있어서 기쁘다. 대통령이 해외에 세일즈하던 그 완벽한 칠레가 아니라 말이다." (자비에르 아글리오, 25세, 산티아고 시위 참여 중 NPR과의 인터뷰 중)

"우린 1%를 위한 대통령을 갖고 있다." (줄리오 곤잘레스, 칠레 최대 뉴스사이트 '에몰' 기사 댓글 중, 2000여개 넘는 '좋아요'를 받음)

"오랜 시간 조용히 견디며 침묵해왔던 우리는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 (대니얼 만수이, 칠레 국립사회과학연구소(IES) 선임연구원, 에몰과의 인터뷰 중)

'남미의 오아시스'가 무너졌다. 지하철 요금 30페소(50원)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 시위가 일주일 넘게 이어지며 전국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남미 최대 부국이자 안정적 민주주의까지 정착한 나라로 꼽히던 칠레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두고 '예상치 못했다'는 해외 반응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거리에 나선 국민들은 "이것이 바로 칠레의 현실"이라고 외친다. 이번 칠레 시위는 빈부격차 확대가 글로벌 문제로 대두되는 가운데 전세계에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교통비가 월 소득 20%인데 … '50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23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 도심 상공에서 바라본 반정부 시위대 모습.
23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 도심 상공에서 바라본 반정부 시위대 모습.

칠레 반(反)정부 시위는 지난 6일 산티아고지하철공사가 교통 혼잡 시간대의 지하철 요금을 기존 800칠레페소(약 1288원)에서 830페소(1366원)으로 인상을 발표한 것이 화근이 됐다. 그러나 단돈 30페소(50원) 인상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는 지난 1월에도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을 20페소 인상했고, 12년간 지하철 요금은 두 배 이상 올랐다. 심지어 이번 인상안에는 지하철뿐만 아니라 버스비도 검토됐고, 전기요금 10% 인상안을 발표한 지 몇 주 만에 나온 터였다.

칠레의 한 달 최저임금은 30만페소(약 48만원)에 불과하며, 월 소득이 550달러(약 64만원) 이하인 노동자는 절반을 넘는다(칠레 국립통계연구소). 산티아고 주민들의 상당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최대 2시간이 걸려 출퇴근하며, 매달 소득의 20%가량을 교통비에 쓴다. 잦은 교통비와 공공요금 인상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후안 안드레스 폰테인 경제부 장관의 "돈을 더 내기 싫으면 일찍 일어나면 된다"는 말은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14일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작된 시위는 도심 곳곳으로 확산됐고, 평화 시위를 군대가 진압하는 영상이 SNS에 퍼지며 반발은 더욱 커졌다. 노동자까지 합세하며 시위는 지하철 요금 인상뿐만 아니라 시위대 폭력 진압·칠레 정부의 이중성과 위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 격렬 시위대가 방화나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18일 밤 칠레 정부는 산티아고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무장 군인을 배치했고, 오후 10시~오전 10시 사이 통행금지령까지 내렸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것은 칠레가 민주화된 1990년 이후 29년 만이다.

당황한 칠레 정부는 19일 지하철 요금 인상안을 철회한 데 이어 22일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함께 최저임금 및 연금 수령액 인상, 부자 증세 등 경제대책을 발표했다. 또한 공공서비스 요금을 동결하고, 의료비 국가 부담을 높이며, 공무원 수와 임금을 줄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칠레노동자연합(CUT)을 포함한 20개 단체가 23일 예고대로 총파업에 돌입하는 등 시위는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칠레 인권위원회(INDH)에 따르면 지난 18일 이후 시위 도중 최소 18명이 숨졌으며, 535명이 부상했고, 2410명이 군과 경찰에 체포됐다.

1인당 GDP 2만달러 달했지만 … '남미의 오아시스' 뒤에 가려진 불평등
(산티아고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0일 (현지시간) 산티아고에서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던지고 있다.   © AFP=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산티아고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0일 (현지시간) 산티아고에서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던지고 있다. © AFP=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칠레 시위가 유독 관심을 받는 이유는 칠레가 잡음이 끊이지 않는 중남미에서 '살만한 나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칠레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6078달러로 남미국가 중 우루과이에 이어 2위였고,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GDP는 2만5700달러에 달했다. 2010년 남미 국가 중 처음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국가도 칠레였다.

정치적으로도 1990년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민주화가 안정적으로 정착된 나라로 꼽혔다. 로이터통신은 칠레를 "청렴한 통치와 투명성, 투자자 친화적인 환경으로 남미의 총아로 불린다"고 전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칠레를 '남미의 오아시스'라고 칭해왔다.

그러나 시민들이 분노한 지점은 '과연 누구를 위한 오아시스냐'는 의문이었다. 화려한 칠레의 성장 이면에는 극심한 불평등이 자리한다. 칠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빈부격차가 최고 수준에 달한다. 소득 격차는 OECD 평균보다 65%가량 크다. 지난해 칠레 정부가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최상위층 소득이 최하위층 소득보다 13.6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부 의지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칠레의 문제는 자원 부족이 아니라 시민들에 대한 의무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해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1973년부터 1990년까지 17년간 칠레를 장악한 군사 정권은 자유시장 경쟁을 장려하고,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법과 경제정책을 뜯어고쳤다. 이는 군사 독재가 끝난 이후에도 지속됐다. 아직도 칠레의 정부 재정지출 규모는 OECD 국가 중 바닥 수준이다.

억만장자 대통령과 "일찍 일어나라"는 장관 … 누구를 위한 오아시스인가
(산티아고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0일 (현지시간) 산티아고에서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 반정부 시위대의 방화로 버스가 불에 타고 있다.  © AFP=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산티아고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0일 (현지시간) 산티아고에서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 반정부 시위대의 방화로 버스가 불에 타고 있다. © AFP=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49세 변호사인 엔리케 아라야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이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칠레 수도인 산티아고 도심은 고급 아파트단지, 개인 병원, 사립 학교 등으로 가득 차 미국의 맨해튼과 비견돼 '산해튼(Sanhatton)'으로 불릴 정도다. 그러나 도심을 벗어난 공공병원이나 공립학교 등은 부족한 지원금과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환자와 학생들로 골치를 앓아왔다.

로이터통신은 "시위대는 그들이 높은 교육 비용, 보건시스템, 주택임대료, 공공요금에 시달려왔으며, 민영화된 연금제도는 급여도 적은 데다 종종 지급이 연기되기까지 해 불만을 키웠다고 호소한다"고 전했다.

시위 초반 국민감정과 유리된 정치인들의 태도 또한 문제였다. 시위가 격화되기 전 피녜라 대통령은 시위대가 대부분 평화적으로 진행됐음에도 "전쟁을 치를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고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했다. 억대 자산가 출신인 그가 서민 시위대의 울분을 이해할 수 있냐는 비판도 인다. 앞서 언급한 "일찍 일어나라"는 경제부 장관의 발언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산티아고 소재 사립대학 유니버시다드 마요르의 로드리고 페레스 개발경제학 교수는 "비슷한 불평등 수준을 지닌 나라도 있지만, 칠레의 경우는 정부가 재분배나 소득 격차 해소를 위해 아무것도 해오지 않았다"며 "칠레 인구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며 시민들도 사태를 빠르게 인식하게 됐고, 이는 (정부가) 시민들의 눈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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