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성공의 비결은 '교육' 아닌 '자본'이었다 [PADO]

스코틀랜드 성공의 비결은 '교육' 아닌 '자본'이었다 [PADO]

PADO 국제시사문예지
2026.04.25 06:00
[편집자주] 이 글은 혁신의 역사를 구독자 기반으로 섭스택에서 집필하고 있는 앤턴 호위스의 3월 25일자 에세이인데,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흄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동력이 교육이 아니라 금융상의 혁신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이 잉글랜드보다 많았고 혁신적이어서 상공인들이 담보가 아니라 신용만으로 자금을 얻기 쉬웠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금인출이라고 부르는 제도도 스코틀랜드가 먼저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본확보의 이점에서 스코틀랜드는 특히 북미 버지니아의 담배 수입에서 무역 거점이 될 수 있었고, 다른 여러 부분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적인 성과들이 스코틀랜드에서 이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은 금융적 혁신이었다고 합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한국 금융의 경쟁력은 어떤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기사 전문은 PADO 웹사이트(pado.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픽=PADO(생성AI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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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는 한때 국력에 비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인구가 이웃인 잉글랜드의 4분의1에도 못 미쳤음에도, 그리고 헨리 8세가 여러 차례 정복을 시도했음에도, 승리를 거둔 쪽은 이 작은 국가였다. 이후 영국 군주들의 혈관에는 강압적인 헨리의 피가 아니라 교활하고 인내심 강한 제임스 6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제임스가 두 나라를 모두 통치하게 되자—정확히 423년 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통합된 브리튼섬과 곧 정복하게 될 제국이 제공하는 기회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훨씬 수가 적은 스코틀랜드인들이었다.

탐험과 행정에서의 기회 포착을 넘어, 작은 스코틀랜드가 가장 두드러졌던 점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상의 산실로서의 독창성이었다. 해부학, 동물학, 식물학, 경제학, 전자기학, 기계공학, 의학, 통신 등 수많은 분야에서 스코틀랜드의 영향력은 유난히 컸다.

왜 이토록 많은 분야의 역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이 과도할 정도로 많이 등장했을까?

1560년대 칼뱅주의의 부상과 이후 세금으로 운영되는 전국적 학교 체제의 구축 덕분에 스코틀랜드인의 문해력이 유난히 높았다는 설명이 흔히 제시된다. 더 나은 교육 덕분에 스코틀랜드인들이 더 많은 기회를 추구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고결한 의도가 자동으로 성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고, 18세기 남성 문해율은 그러한 체계적 교육 제도가 없었던 잉글랜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여성의 경우 훨씬 더 낮았다. 스코틀랜드의 문해율이 눈에 띄게 더 높아진 것은 이미 상당 기간 체급 이상의 성과를 내고 난 이후인 18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세기에 이르면 스코틀랜드 학생의 3분의1도 채 되지 않는 비율만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대다수는 사립 유료 학교에 다녔다.

스코틀랜드의 성공에서 문해력 확산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스코틀랜드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경제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 스코틀랜드인들은 점점 교육비를 지불할 여력이 생겼고, 그 결과 문해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이 체급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롭게 형성된 부의 증가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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