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낭자군의 백두산 세레모니는 장하고 눈물겹다. 낭랑 18세 언저리의 어떻게 보면 소녀티를 갓 벗어난 한국의 젊은 낭자들의 열렬한 나라 사랑이 장하고 그 장함이 눈물겹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사전에 예비된 것도 아닌 백두산 세레모니는 강낭콩보다 더 붉다는 한국 여성들의 뜨거운 마음이 역사 속에서 한점 흐트러짐 없이 이어져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정치를 올림픽에 개입시켜서는 안된다는 올릭픽 정신을 말한다. 그러나 올림픽 정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또래의 또 다른 한국 낭자들은 백두산은 우리 땅이고 우리 땅을 우리 땅이라고 말한 것이 어떻게 정치적 행위일 수 있는가라고 반발한다.
백두산 세레모니를 연출한 선수들 또한 이런저런 외교정치적 언사들에 대해 ‘우스쾅스러워요. 왜들 난리죠’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중국 측 반응은 거칠고 오만하다. 처음부터 그들은 거칠고 오만했다.
왜 그들은 개막식 식전 공연 ‘빙설(氷雪)의 창춘’ 공연 배경에 백두산 천지(天池)에 중국을 나타내는 중(中) 자를 크게 오버랩시켰고, 왜 백두산에서 성화를 채취했으며, 만주 일대 학교들의 이름에 백두산의 그들 이름인 장백산의 이름을 붙여 새로 지었는가.
이 모든 것이 백두산이 그들의 것임을 나라 안팎으로 각인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의식조작 행위가 아닌가.
백두산은 동이족(東夷族)의 성산( 聖山)이지 한족(漢族)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국 땅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은 중화족이며 따라서 만주족인 청나라 왕실이 백두산을 성역화한 적이 있으므로 백두산을 중국의 성산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부터 중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중화족으로 보고 있는가. 중국 상하이(上海) 루신(魯迅) 공원에 가보면 중국인들 특히 한족들이 루신을 얼마만큼 존경하고 있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물론 루신은 위대하고 존경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루신이 1926년 북경에서 쓴 글을 보면 만주족은 외세일 따름이지 그들의 동족이 아니다. ‘화개집‘에서 루신은 ’ 무기가 우리보다 더 정밀하고 예리한 구미 사람들, 무기가 우리보다 반드시 정밀하고 예리하다고 할 수 없었던 흉노와 몽고, 만주족들이 모두 무인지경처럼 쳐들어왔다‘는 대목이 있다.
서구 열강이 양이(洋夷)라면 만주족은 동이(東夷)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 백두산을 그들의 성산으로 삼으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동잎 한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안다고 한다. 모든 변화에는 그 변화를 알리는 조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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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짐을 보고 변화를 알며 변화에 대처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중국은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것일까. 변화를 알리는 조짐들이 이를 있는 그대로 말해준다. 지난해 11월 13일부터 24일까지 중국 중앙 방송 CCTV에 방영된 역사 연속 다큐물 ‘대국굴기(大國?起)도 그런 조짐 중의 하나이다.
’대국굴기‘는 영국과 프랑스 . 독일, 미국,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 이른바 그들이 말해온 제국주의 국가들의 역사를 다루면서 타인의 피로써 자신의 부를 쌓아올렸다는 제국주의적 탐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탐욕이 이들 국가들을 세계의 강대국으로 이끈 기본 추동력이었다는 것이다. 패권에 반대하고 패권을 결코 추구하지 않겠다는 반둥 선언 때의 중국이 아닌 것이다. ’대국굴기‘에 대한 서방 언론들의 논평처럼 지금 중국의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자기민족에 대한 극단적인 사랑과 우월감을 부추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타민족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통해 중화 제국의 건설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패권 추구는 역사가 보여주듯 타민족은 물론이고 자기 나라 인민들도 불행의 길로 몰아넣을 따름이다. 중국이 진짜로 평화와 번영의 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백두산 세레모니에 난리를 피울 것이 아니라 반둥선언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