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이론에 ‘공약(公約)’이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의 일부를 스스로 봉쇄함으로써 약속의 신빙성을 높이는 전략을 가리킨다. ‘배수의 진'이라는 군사용어와 유사하지만 늬앙스는 약간 다르다. 배수의 진은 불리한 상황에 처한 아군의 사기를 높이겠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공약‘은 자신의 손을 묶어둠으로써 어떤 상황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도입한 인플레이션 목표제도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공약’이다. ‘현 상황에서 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으니 잔말말고 따라오라’는 일종의 경고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통화정책 투명성 제고 방안을 들고 나왔다. 경제전망치 발표 횟수를 늘리고 범위를 넓힌다는 것이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예측치도 발표하겠다고 했다.
버냉키 의장은 취임 이전부터 인플레이션 목표제 도입을 수시로 주장해왔다. 하지만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 공식적인 도입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연준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다.
따라서 버냉키 의장의 이번 ‘공약’은 일종의 차선책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겉으로는 시장과의 의사소통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인플레이션 및 경기전망 예측치를 발표함으로써 금리결정에 있어 스스로 족쇄를 채우겠다는 의미다. 시장에 길들여졌다는 ‘오명’을 씻고 통화정책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지도 읽힌다.
월스트리트저널도 버냉키 의장이 이번 조치를 통해 사실상의 인플레이션 목표제를 도입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고유가와 약달러로 스태그플레이션 경고음이 울리고 있는 현 상황에서 버냉키 의장은 어쩌면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을 롤모델로 삼고 있을 지도 모른다. 볼커 전 의장은 오일파동 당시 과감한 금리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월가의 금리인하 기대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버냉키 의장의 배수진이 성공할 지 다음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