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적자생존, 메모 풍속이 진화하고 있다

新적자생존, 메모 풍속이 진화하고 있다

이정흔 기자
2010.08.24 10:13

[머니위크 커버]新적자생존法 / 新메모 풍속도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알아주는 메모광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세계적인 과학자의 연구실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하던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주머니에서 만년필과 종이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일상생활 중에 뭔가 떠오를 때면 그때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록하고 골똘히 생각합니다. 제 실험 장비는 만년필과 종이, 그리고 다 쓴 종이를 버릴 휴지통이면 충분하죠.”

"생각은 쉽게 달아나기 때문에 붙들어두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생각을 붙들어두는 방법으로 메모보다 좋은 것이 없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지은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 펴냄)이라는 책의 한 구절이다.

‘적는 사람이 생존한다’는 적자생존. 하루의 지출입을 기록하는 가계부, 생각을 붙들어 두는 메모장, 그리고 복잡하기만 한 업무를 정리해 주는 스케쥴 관리까지. 적고 기억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메모의 위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만큼 '메모의 풍경' 또한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세월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IT 디바이스의 발전 덕분이다. ‘만년필과 종이, 그리고 휴지통’만 있으면 어디든 실험실이 필요 없는 아인슈타인도 지금은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필수일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원하는 때 바로바로 기억을 불러낼 수 있고, 필요한 정보를 찾느라 수첩을 뒤적일 필요도 없다. '적자생존'을 넘어선 ‘新 적자생존’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다이어리 안 들고 다녀요”

따르릉. 내일 있을 프리젠테이션 준비에 한창이던 한수진 과장은 알람 소리에 흘깃 휴대폰을 쳐다본다.

‘7시. 거래처 박 부장 저녁’

자신의 업무 경력은 물론 부서 전체가 매달려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집중하다 보니 하마터면 약속을 놓칠 뻔 한 것이다. 한 과장의 휴대폰 메인 화면에 떠 있는 동그란 시간표. 마치 초등학교 때 방학생활계획표를 짰던 것처럼 생긴 이 스케줄 표에는 그의 하루 일과를 꽉 채울 중요한 업무와 집안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업무나 개인 일정을 꾹꾹 눌러쓰다 보니 어느새 꼬깃꼬깃 닳아 해진 수첩이나 책상 한켠의 달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요즘 직장인들은 수첩이나 달력에 일일이 손으로 스케줄을 적는 대신 한 과장처럼 휴대폰이나 PC를 먼저 찾곤 한다.

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하는 홍유정 씨(가명)는 “스마트폰 구입 후 스타벅스 아이플래너 앱을 사용 중”이라며 “캘린더, 할일, 다이어리가 통합돼 있어 사용하기 편한 것 같다”고 만족해 했다. 수시로 일정 확인이 가능한데다 시간에 맞춰 알람까지 울려주니 다이어리 수첩을 쓸 때보다 훨씬 일정관리가 체계적으로 된다는 것이 홍씨가 꼽은 가장 큰 장점.

“아무래도 휴대폰은 아직 자판을 치는 게 조금 불편해서, 중요한 일정은 PC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가 휴대폰으로 옮기곤 합니다. PC화면이 커서 한눈에 보기 편하니까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때도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컴퓨터게임 벤처기업의 게임기획개발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이민형씨(가명). 그에게는 컴퓨터 화면이 바로 다이어리나 다름없다. 그는 ‘드리미’라는 스케줄관리 PC프로그램을 사용 중이다.

이씨는 “컴퓨터 바탕화면에 투명하게 일정 창을 띄워 놓을 수 있어, 일주일간의 일정을 한눈에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단순히 일정을 기록하는 것뿐 아니라 매주 스케줄을 정리하거나 계획을 세울 때 굉장히 편하다”고 설명한다.

“어차피 일하면서 늘 컴퓨터를 켜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 화면에 일정을 띄워놓으면 놓칠 일이 별로 없어요. 알람기능도 있고요. 다이어리 수첩을 굳이 쓸 일이 없어서, 앞으로도 다이어리는 안 사게 될 것 같은데요. 하하”

♦ “가계부 정리? 돈 쓰면 바로 그 자리에서!”

대기업 인사과에 근무하는 서주경씨(가명)는 모네타 가계부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다운 받아 사용 중이다.

그는 “‘교육비’ ‘식비’ 등 항목별로 지출 액수가 한눈에 비교돼 내 소비 습관을 점검할 수 있고, 현금 사용액과 카드 사용액을 따로 구분해 넣을 수 있어 손으로 기입할 때보다는 훨씬 정리된 느낌이다”고 장점을 설명했다. 매달 카드 청구액 통계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기 때문에 계산기를 일일이 두드릴 필요 없이, 훨씬 효율적이고 편리한 가계부 관리가 가능하다. 다만 “현금 흐름을 오목조목 온라인에 유출하려다 보니 보안문제가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서씨는 덧붙였다.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 쓰고 있다는 직장인 최현구씨(가명) 역시 얼마 전부터 ‘차계부’와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사실 지금까지는 아내가 가계 관리를 다 해서 내가 가계부를 따로 써야 할 이유가 없었고, 귀찮기도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카드 영수 청구 문자만 오면 바로 가계부에 자동 입력이 되니까, 따로 기입하지 않아도 기록이 남으니 편하죠. 가계부를 안 쓰니까 운전하면서 따로 차에 들어가는 비용을 정리해 두기도 어려웠는데 차계부 앱을 받고 나서는 많이 편해졌어요. 제 아내가 가장 좋아하고 있습니다.”

30대 싱글족 이지수씨(가명). 아직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터라 가계부 쓰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천에 옮기기가 그리 쉽진 않았다.

그런 이씨에게 가계부 쓰는 습관을 들이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다름아닌 스마트폰의 가계부 앱. 지출이 있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기입해 넣을 수 있으니 오히려 색다른 재미를 느끼며 습관을 들이고 있는 중이란다.

“내가 지출이 많다는 건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는 전혀 모르고 살았죠. 막상 가계부를 쓰려고 해도 저녁에 들어가면 다 잊어버리고, 피곤해서 쓰러지기 바쁘잖아요. 일단 가계부를 적고 보니 유독 지출이 많은 항목 등을 알아서 정리해주니까. 아무래도 예전보다는 카드를 긁을 때마다 의식하게 되죠.”

가계부 쓰기에 조금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씨는 얼마 전에는 스마트폰 앱과 똑 같은 가계부 PC프로그램도 장만했다. 현재는 두 개를 같이 연동해서 사용 중이다. 그는 “밖에서 그때그때 지출 내용은 폰으로 바로 바로 기록하고, PC에서는 펀드나 카드값 등 조금 더 액수가 크고 중요한 자금 계획을 짜는 데 주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순간의 짧은 기억도 오래도록 간직한다!”

뮤지컬 마니아인 최현하씨(가명)는 요즘 공연을 보고 나오면 휴대폰을 가장 먼저 연다. 공연을 보고 난 뒤의 느낌이나 인상 깊었던 점을 바로 바로 메모해 놓기 위한 것이다.

최씨는 “오래 전부터 공연만 보고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블로그라도 운영해 보고 싶었지만 게을러서 그런지 잘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휴대폰 자판이 아직 불편해서 길게 감상을 적기엔 불편하지만, 굳이 시간을 따로 내지 않아도 바로 적을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나중에 후기 남겨야지’ 하고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휴대폰에 짧은 느낌을 적어 놓으면 후에 기억되는 것도 훨씬 많아요. 인상 깊었던 작품은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둔 짧은 글을 보며 기억을 되살려서 PC에서 길게 글을 쓴 다음에, 휴대폰이랑 연동해서 다시 옮겨오기도 해요.”

광고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수첩을 늘 갖고 다니며 메모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목정민씨(가명). 그는 “최근 스마트폰을 구입했는데, 종이와 연필이 없어도 언제든 메모가 가능해져서 편하다”고 말한다.

목씨는 “특히 예전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급히 잡히는 곳에다 메모를 해놓고 어디 뒀는지 몰라서 헤매는 경우도 많았는데 필요한 메모를 찾는 것도 훨씬 쉬워졌다”고 만족해했다.

“스마트폰 앱은 ‘다이어트 다이어리’ ‘영화 감상문’ 등 워낙 목적이나 종류별로 다양하잖아요. 초기에는 이것저것 다 다운받아서 따로 관리를 했는데 요즘에는 모두 없애버리고 기본으로 깔려있는 메모 앱에서 다 해결하고 있어요. 그래도 내용에 맞게 항목별로 분류해서 관리할 수 있어서 불편한 건 없거든요. 원래 잘 잊어버리는 편인데 항공 사이트 회원번호나 비밀번호 같은 걸 메모장에 따로 적어두고 사용하기도 해요. 취재 차 나갔을 땐 녹음기 앱을 이용해 더 자세하게 현장을 기록하기도 하고요. 여전히 수첩을 들고 다니긴 하지만 예전보단 덜 쓰게 되는 게 사실이죠."

“그래도 나는 종이가 좋다!”…아날로그 메모광들의 항변

취재 중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스마트폰과 PC프로그램을 이용해 메모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메모가 훨씬 수월해졌다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를 저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종이와 연필’이 주는 특유의 매력을 ‘IT기기의 편리함’이 완전히 덮어버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메모광 목정민(가명) 씨는 “글자로 밖에 메모할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아쉬운 점으로 곱았다. 그는 단순히 글자만 써서 메모하기 보다는 기호나 그림을 자주 그려 넣는 편인데, 글자입력 위주로 돼있는 스마트 폰에서는 간단한 기호나 그림 외에 자유로운 표현에 제한이 있는 것이 사실.

가정주부 조민주(가명) 씨는 온라인 가계부 프로그램을 사용하다가 다시 종이 가계부로 바꿨다. 그는 “온라인 가계부에서는 그냥 숫자라는 느낌이 강한데, 내 손으로 또박또박 적다보면 돈이라는 게 확실히 실감난다"며 "가계부의 원래 목적인 알뜰 지출을 위해서는 손으로 적는 가계부가 더 효과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인 하재영(가명) 씨는 “아직까지는 자판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휴대폰도 조금 불편하고, 컴퓨터는 꼭 컴퓨터가 앞에 있어야 하니까 종이를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며 “적어 내려가는 속도는 종이가 훨씬 빠른 것 같다”고 두둔한다. 그는 “수첩에 마구 끄적이다 보면 내용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 있다”며 “메모할 때 기분에 따라 글씨체도 다르고, 가끔씩 뒤적이다보면 추억을 곱씹는 느낌도 있어서 종이를 쉽게 버리진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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