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소주 안주' 새우깡이 맛있었던 이유

[광화문]'소주 안주' 새우깡이 맛있었던 이유

박창욱 생활경제부장
2011.05.13 08:01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가려면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타야했다. 정류장에 내려서도 나무가 양 가로 늘어선 시골길을 따라 엄마 손에 이끌려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갔다. 그땐 그게 그렇게 귀찮고 싫었다.

하지만 외갓집에 도착하면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외할아버지께선 오래된 서랍장에서 이것저것 단 것을 주섬주섬 꺼내 손자들에게 주셨다. 그 가운데 특히 연양갱 맛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연양갱을 먹으며 외할아버지의 대머리를 쓰다듬고 놀았다. 엄마는 버릇없다고 야단을 쳤지만,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미소를 지으셨다. 그래서 지금도 연양갱을 보면 외할아버지의 인자한 얼굴이 떠오른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초등학교 가기 전, 남탕과 여탕을 오가곤 했다. 내 경우엔 아버지와 남탕에 가는 게 엄마와 목욕 가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엄마는 살갗이 벗겨질때까지 몇 번이고 때를 밀었는데,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목욕이 끝나면 바나나맛 우유를 사주셨다.

바나나가 귀하던 시절이라 바나나맛 우유는 유난히 더 맛있었다. 그냥 우유론 채우지 못하는, 설명하지 못할 갈증을 풀어줬던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무척 엄하셨고 무서웠다. 하지만, 바나나맛 우유를 함께 먹을 때만큼은 엄마보다 더 좋았다.

그러고 보면 맛있는 먹을거리는 대부분 추억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냥 맛있기만 해선 맛있는 기억이 되지 못한다. 좋은 추억이 미각의 형태로 머릿속에 남는 거다. 중·고교 시절 수학여행 가면서 삶은 계란과 함께 먹었던 칠성사이다엔 탄산가스 대신 풋풋한 사춘기의 우정이 녹아 있었고, 대학 다니던 시절 친구 몇 놈과 소주를 마시며 안주로 먹던 새우깡엔 맛소금 가루가 아니라 젊은 시절의 희망이 묻어 있었다.

미각은 이처럼 다른 감각과 잘 어울려 헤어나기 힘든 `멋진 공감각'의 세계를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번 들인 입맛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식품업계에 유독 장수기업과 장수제품이 많은 이유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보자. 우리나라 주요 식품기업들은 투자 대상으로서 과연 적합할까. "미래가 밝은가"를 묻는 말이다. 식품기업 담당 데스크로서 내 의견을 밝히자면 답은 `노(NO)'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 아버지와 내 세대까지 추억을 줬던 식품기업들이 우리 아이들 세대에겐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품업계엔 아직도 수십년 된 제품들이 주력 매출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수년간 주력제품으로 자리를 잡을 정도로 큰 히트를 친 신제품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새로운 제품을 위한 도전을 별로 하진 않는단 얘기다.

"신제품을 내놓으려면 설비투자를 많이 해야 하고 마케팅을 펼치는 데도 돈이 많이 듭니다. 보수적인 기업 문화 때문에 경영진들은 이런 위험 부담을 지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검증받은 장수제품을 리뉴얼하는데만 주로 신경을 쓰는 실정입니다." 한 식품기업 고위관계자의 실토다.

이러다보니 추억을 선사해 줄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편법 가격인상'이라는 비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감동시킬 자신이 별로 없으니,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감동시킬 엄두도 내지 못한다. 식품기업의 해외진출이 활발하지 못하단 소리다.

당연히 세계적인 기업도 없다. 최근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해 발표한 `2010 글로벌 식품기업`에 담배회사를 빼면 한국의 식품기업은 CJ제일제당(107위) 단 한 곳만 포함됐다. 식품업계에 변화의 바람이 절실하다.

"모험이 없으면 제자리 걸음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엔 뒤떨어지며, 그 다음엔 아주 주저앉게 된다." 아산 정주영의 말이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