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관련 대기업인 A사는 일본 업체와 공동 투자한 자회사를 만드는 방식으로 신사업에 진출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일반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국내 계열회사 지분을 100%가 아니면 소유해선 안된다는 공정거래법 조항 때문이었다. A사는 그룹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로, 이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 결국 수백억, 수천억 원이 될 수 있는 투자도, 그에 따른 고용 창출도 유보됐다.
이런 내용을 공론화하면 법 개정에 힘이 실리지 않겠느냐는 말에 A사 관계자는 손사래를 쳤다. "가뜩이나 경제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와중에, 계열사를 더 늘리겠다는 얘기로 들려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주회사의 자회사나 손자회사의 주식 소유를 제한하는 것은 지배주주의 지배력 확장과 경제력 집중을 막자는 지주회사제도 도입 취지에서 보면 일리가 있다. 이를테면 지주회사가 51%의 지분을 갖고 있는 자회사가 손자회사의 지분을 51% 갖고 있을 경우 지주회사는 손자회사의 배당권을 26%만 갖지만, 이사회는 100% 장악할 수 있다. 여기에 증손자회사까지 둘 경우 의결권과 배당권 사이에 괴리가 너무 커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행위제한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알짜 계열사를 처분해야 하거나, 신규 사업에 진출하지 못하는 사례가 줄을 잇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어느 것이 우리 경제를 위해 더 바람직한지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일감몰아주기, 골목상권 침투 등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반기업 정서가 팽배해졌다. 대기업 총수들을 범죄의 경중 구분 없이 법정 구속부터 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다.
국회에서는 기업에 대한 규제 강화를 의미하는 경제민주화 법안들이 처리를 기다리고 있고,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들의 위반 사항을 찾기 위해 현미경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공공의 적'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그럴수록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현금성 자산을 쌓아 놓고도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것도 기업의 현실이다.
매판자본(買辦資本). 식민지나 후진국 등에서 외국자본과 결탁해 자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토착자본을 뜻한다. 1980년대 운동권이 대기업을 비판할 때 이 표현을 흔히 썼다. 기업들은 오히려 전 세계를 무대로 외국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 기업에 대한 인식은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