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통보다 작고 컵보다는 큰 어떤 물건

물통보다 작고 컵보다는 큰 어떤 물건

김주동 기자
2015.05.21 06:16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식당에서 쓰는 물통보다 작다.

흔히 쓰는 컵보다 큰데 손잡이가 없다.

뚜껑이 있고 재질은 스테인리스나 두툼한 플라스틱이다.

어떤 물건에 대한 묘사다. 만약 이것이 갓 생겨난 것이라면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미 떠올린 이름이 있을 것이다. 커피전문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텀블러'다.

텀블러가 인터넷에서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1일 국립국어원이 우리말 다듬기를 통해 텀블러를 대신할 말로 '통컵'을 제안했을 때다. 한 포털사이트에 올라간 관련 기사는 900개 정도 댓글이 달리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댓글의 반응은 대부분 별로 좋지 않거나 매우 나빴다.

"우리말로 했다더니 왜 컵이 들어가냐"는 반응이 많았고, "외래어는 그냥 외래어로 두자"는 반응도 있었다.

그런데 왜 통컵이었을까? 국립국어원의 한 연구관과 통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우선 우리말 다듬기 활동은 외래어를 몰아내려는 순혈주의가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말을 찾으려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통컵은 텀블러의 원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텀블러(tumbler)는 영어 tumble에서 나온 말인데, 여기엔 '굴러 떨어지다', '공중제비 넘다'라는 뜻이 있다. 손잡이가 없어 구를 수 있는 컵의 특징이 반영된 말인 셈이다. 물통, 드럼통, 깡통 등의 모양을 생각해 보면 '통컵'이 나온 과정이 설명은 된다.

많은 사람들이 텀블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뭐야?'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익히고 익숙해진 뒤에는 누군가가 다른 말로 바꾸자고 할 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구나 그런 제안이 지금 쓰는 말이 잘못됐다는 지적으로 들린다면 반감도 들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또 다른 연구관은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텀블러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 통컵이라고 했더라면…"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만약 '플라스틱백(plastic bag)'이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널리 쓰였다면, 누군가 '비닐봉지'로 바꿔 쓰자고 제안했을 때 통컵과 같은 반응이 나왔을지 모른다.(plastic bag은 비닐봉지의 영어식 표현.) 고심 끝에 제안한 말도 대중들이 거부하면 쓰일 수 없다. 말은 기본적으로 대중들의 선택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쓰는 말에는 어려운 한자어가 많고, 영어식 표현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엔 영어 단어 여러 개가 묶인 표현들도 눈에 띈다.

다듬은 말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 다듬기 움직임 자체는 선입견 없이 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은 국어원에서 제안한 다듬은 말들 중 몇 개다.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더러는 괜찮다 싶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프로파일러→범죄분석가, 자동제세동기→자동 심장 충격기,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즉시퇴출제, FAQ→자주 하는 질문, 디퓨저→방향기.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김주동 기자

다른 생각도 선입견 없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