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민의 팔진도]소설 '분노의 포도' 권유받았던 대통령의 아들딸…연대와 저항을 낳는 분노
“가뭄으로 거북등같이 갈라진 땅, 거기서 피어오르는 먼지폭풍..힘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차별과 배제의 블랙리스트”
2017년 대한민국의 얘기가 아니다. 80여년 전 바다 건너 미국의 살풍경이다. ‘가뭄, 블랙리스트’ 묘하게 겹쳐지는 두 나라 얘기들을 잇는 또다른 매개가 있다. 버락 오바

마 미국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공통점 많은 두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권한 책 중 한권의 내용이다. 80년 전인 1939년에 초판이 나온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가 그 책이다.
먼저 소설의 고향인 미국의 오바마. 아버지는 딸들에게 고전 읽기를 강조했고 큰딸 말리아는 '분노의 포도'를 읽고 있다고 소개한 이는 2011년 당시 영부인 미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권장 도서 ‘분노의 포도’를 공개한 건 아들 문준용씨였다. 문씨는 최근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를 통해 “동생과 함께 서점에 데려가 책을 사주는 게 (아버지의) 여가활동이었다”며 “중학교 1학년인가, 어린 나이에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같은 소설을 읽어보라고 하신 게 기억난다”고 했다.
대통령 자식들의 감상을 전하려는 건 아니니 그 책을 권한 아버지의 의도를 조금 따라가보자. 명작이라고만 규정짓기에는 ‘분노의 포도’에는 논쟁이 뒤따른다. 초판 출간 당시 그 책에는 ‘계층 간의 반감을 조장해 폭동을 선동하는 공산주의 소설’이라는 비난과 ‘실용주의, 대중 민주주의 같은 미국 사상이 녹아 있는 빼어난 작품’이라는 찬사가 공존했다.
오바마와 문재인이 반대 진영에서 똑같이 좌파(미국에는 종북이라는 말은 없긴 하다)라고 비판받은 것을 감안하면 1930년대 미국 농민들의 곤궁한 삶을 그린 ‘분노의 포도’에 대한 평가가 겹쳐진다. 몇 년전 미국에 있는 교포 의사로부터 당시 ‘대통령 오바마는 코뮤니스트(Communist)’라는 평가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전쟁을 겪은 뒤 ‘공산주의’가 싫고 두려워 바다를 건너간 그는 의료보험제도 개혁(오바마케어) 등을 빌미로 ‘코뮤니즘’(공산주의)이라는 점잖은 말을 통해 사실 ‘빨갱이’(?)라는 딱지를 오바마에게 붙이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문 대통령도 정치 입문 후 계속 좌파 종북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분노의 포도’에서는 대공황과 더스트 볼(Dust Bowl, 1932년부터 약 5년간 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평원을 휩쓸었던 사막화 현상과 먼지 폭풍)로 좌절하는 농민들(조드(Joed) 가족)이 주인공이다. 모래언덕이 돼 가는 오클라호마에서 빚 때문에 땅을 잃은 농민 가족은 포도가 영근다는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하지만 수십만명의 유랑민이 몰려들며 일자리 구하기는 더 어려워졌고 오클라호마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캘리포니아에서는 범람하는 강물로 변해 주인공 가족과 세상을 삼켜버린다.
독자들의 PICK!
80여년전 상황인데도 미국의 상황과 현재 한국이 묘하게 겹쳐진다.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대지가 배경인게 대표적인데 '분노의 포도' 21장에는 또다른 대목이 나온다. ‘스스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중략) 그들은 품삯으로 지불할 수도 있었던 돈을 공작원을 고용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사람들을 훈련하는데 썼다.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도 검은 딱지가 있었다.
소설을 권한 대통령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먼 훗날 자신의 국민들에게 정당한 분노를 옮겨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물론 대통령의 자식들조차 그런 책을 추천한 부모를 멋진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려운 책이라고만 했다. '분노의 포도'에서 아기를 사산한 주인공의 큰 딸은 굶어죽어가는 중년 남성에게 자신의 젖을 물린다. 복수와 배제로 이어지는 증오 대신 저항과 연대를 낳는 분노, 30년전에도 올해도 여전히 뜨거운 6월10일, 분노해야 할 이유다. 소설 끝 문장이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채우며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