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24일 제12회 대학가요제 '무한궤도' 대상

1988년 12월24일 잠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제12회 대학가요제는 단 한 팀의 무대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당시 사회자를 맡은 이택림은 "본선 경연에서 마지막 한 팀. 참가번호 16번 서울 대표 그룹사운드 '무한궤도'"라고 이들을 소개했다.
무대에 오른 '무한궤도'의 리더는 스무살을 갓 넘긴 서강대 철학과 2학년생 신해철이었다. 흰 남방 위 아이보리색 니트 조끼를 청바지에 잘 넣어 입은 말쑥한 모습이었다. 차림새와 달리 강렬한 전주가 시작되자 관객의 함성이 쏟아졌다. '마왕' 신해철의 화려한 데뷔였다.

본선 경연 무대를 앞두고 대학가요제 참가자 인터뷰를 맡은 김은주 전 MBC 아나운서는 신해철에게 "이번 참가 팀 중 가장 뒤에 하는데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해철은 "다른 생각 특별히 한 건 없고요. 빨리 집에 가서 엄마 얼굴 보고 싶다는 생각했다"며 여유로운 농담을 건넸다.
"다들 미남인데 여자친구 있냐"는 질문에도 "절대로 없죠"라며 멋쩍게 웃던 그는 이내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자 표정을 바꿨다. 신디사이저 4대를 동원한 '그대에게'의 전주가 시작됐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조용필을 비롯해 현장 관객과 TV 시청자들은 전주를 듣는 순간 가요제의 대상감이라고 느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보컬 신해철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라는 노랫말을 전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앞의 15개 팀에 대한 관객 반응과 비교해 큰 함성이 쏟아졌다. 결국 출전한 16개 팀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장르로, 가장 마지막에 무대에 선 무한궤도가 대상의 주인공이 됐다.
11년 전 MBC 유튜브 채널에 게시된 이날 영상은 조회수 1265만회에 달할 정도로 현재까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해당 영상에는 "저 시절에 도대체 어떤 영감을 받아서 저런 곡을 만들었을까" "특유의 서울 사투리, 웅장한 전주, 저 많은 관객 앞에서도 패기 넘치는 보컬, 세션까지 완벽하다" "인스타그램 릴스에 떠서 보게 됐는데 매일 보고 있다"는 댓글이 올라왔다.

신해철은 가요계를 넘어 사회·정치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며 당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부터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 스테이션' DJ를 맡아 과감하면서 파격적인 발언으로 '마왕'이란 별명을 얻었던 그는 '엘리트 뮤지션'으로 주목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중퇴라는 학력도 한몫했다.
정치적 발언과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2002년 대선 당시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며 선거유세에도 참여했다. 2003년 이라크전 파병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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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 논객'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사회를 뜻하는 소사이어티(society)와 연예인을 가리키는 엔터테이너(entertainer)를 합쳐 만든 조어 소셜테이너의 원조 격으로 꼽힌다. MBC '100분 토론'에 여러 차례 출연해 간통죄 반대, 학생 체벌 금지 등을 주장했다.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연예인으로서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현실적으로 바뀔 수도 없고 질 수밖에 없는 문제에 왜 뛰어드냐고 주변에서 말한다"면서도 "영악하게 지는 싸움을 피해 가는 사람은 많다. 저는 지는 싸움도 때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2014년 10월27일, 심장 이상으로 수술받았던 그는 향년 46세 나이로 당일 저녁 8시19분 생을 달리했다.
그보다 열흘 전인 17일 그는 서울 송파구 S병원에서 장 협착증 수술을 받은 후 18일 퇴원했다. 이후 고열과 심한 통증, 심막기종 등 복막염 증세를 보이다 그달 27일 중환자실에서 숨졌다.
당시 정치권은 이례적으로 가수의 죽음에 대해 논평을 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났더라도 그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은 '결과보다는 행복한지를 생각해'라는 마지막 메시지와 함께 마왕 신해철씨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듬해 3월 신해철의 사망 원인이 의료 과실에 있다고 판단한 경찰은 해당 병원 원장이자 집도의였던 A씨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후 8월, 검찰이 같은 혐의로 A씨를 기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A씨에 대해 징역 2년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업무상과실치사와 의료법 위반 혐의 등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A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으며 2018년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의료법 위반 혐의에 따라 의사 면허는 임시 취소됐다.
올해 1월에도 A씨는 2014년 7월 혈전 제거 수술을 하던 중 업무상 주의의무를 게을리해 환자의 혈관을 찢어지게 한 혐의로 금고 1년을 선고받았다. 해당 환자는 이후 상급병원으로 옮겨져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사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