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재벌 길들이기

[광화문] 재벌 길들이기

정희경 경제부장
2006.08.10 10:38

"16세의 인도 소년 파이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조난당한다. 타고 가던 화물선이 갑자기 침몰하면서 가족들을 모두 잃고 홀로 구명보트에 오르지만 200㎏이 넘는 벵골산 호랑이가 버티고 있다. 망망대해. 폭풍우와 함께 상어떼가 자주 몰려온다. 호랑이보다 바다가 더 무섭다. 파이는 자신과 호랑이 모두 살아남기 위해 호랑이를 길들이기 시작한다. 폭 2.4m, 길이 8m의 좁은 구명보트 안에 각자의 영역을 정한 후 낚시 등을 통해 호랑이에게 먹이와 물을 제공한다. 호랑이는 파이가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 하지만 허기가 지면 동물적 본능으로 그를 덮칠 수 있다. 이 두려움과 긴장이 생존의 열망을 놓치지 않게 만든다. 227일 간의 사투 끝에 구명보트는 멕시코 해안에 도착한다. 호랑이는 숲으로 사라지고, 파이는 산다."

열대야로 잠못 이뤄 붙잡은 `파이이야기'는 문득 공정거래위원회와 재벌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규제로 인연이 시작된 양측은 최근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대안을 놓고 또한번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마치 서로를 길들이려는 양상이다.

재벌 없는 공정위는 상상하기 어렵다. 재벌의 영향력만큼 공정위 위상도 강화됐다. 규제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할 처지다. 이번 출총제 공방에서 공정위가 재벌보다 유리한 입장이다. 칼을 쥐고 있는 데다, 재벌의 왜곡된 소유구조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명분도 갖췄다.

그래서 "기업에 부담을 적게 주는 출총제 대안을 찾아보자"는 권오승 공정위원장의 말에는 여유가 묻어 있다. 공정위가 민관 태스크포스를 통해 검토 중인 출총제 대안은 순환출자 금지, 유사지주회사 규제 등이다. 이들의 파괴력은 "재벌 해체 수순이냐"는 반문이 나올 정도로 출총제를 능가한다는 분석이다.

권 위원장이 순환출제 규제와 관련해 "불합리한 수단을 통한 지배력 확장문제는 사후규제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언급한 대목도 간단치 않다. 조건없는 출총제 폐지를 요구해왔던 재벌 진영에서 "차라리 출총제가 낫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공정위로선 강한 압박에 힘입어 "대안이 없다면 출총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여건은 조성한 셈이다.

그렇다면 공정위가 재벌 길들이기에 성공한 것일까. 재계를 대변하는 전경련은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의 `뉴딜' 제안에 "출총제가 폐지되면 최소한 8개 그룹이 2년내 14조원의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역제안했다. 순환출자 규제에 따른 부담이 출총제보다는 크다면서 출총제 폐지에 조건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정부가 희망하는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적극 협력할 테니 출총제부터 우선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며, 열린우리당을 통해 공정위를 압박하는 형국이다.

공정위와 재벌은 한 배를 타고 있다. `파이이야기'에서처럼 큰 바다에서 조난당하지 않았고, 올라탄 배 역시 좁은 구명보트가 아니라 아직은 넉넉해 보이는 `한국경제호'다. 하지만 양측이 대립만 한다면 전진은 없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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