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 압수수색권 없어… 자택 조사도 사실상 '불가'

지난 2002년 개봉해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 '본 아이덴티티'를 보면 주인공 '제이슨 본'이 유럽의 한 은행 대여금고를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대여금고엔 현금 뭉치와 여섯 개의 여권, 그리고 권총이 보관돼 있다.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어 자신이 보관한 물품 내역을 알지 못했다. 은행도 무엇이 그의 대여금고에 보관돼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 주인공처럼 기억을 잃지만 않았다면 금고 주인 외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장소가 바로 대여금고다.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을 환수하기 위해 전 전 대통령 일가가 소유한 시중은행의 대여금고 7개를 확보해 압수수색에 나서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은행 고객 전용 소형금고인 대여금고 안의 재산이 과세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국세청에 따르면 세무조사대상자나 고액의 체납자가 대여금고에 거액의 재산을 은닉해도 국세청은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가 검찰보다 훨씬 어렵다. 대여금고는 은행이 화페나 유가증권, 채권, 귀금속 등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고객에게 빌려주는 전용 소형금고다. 은행은 보관물품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아 고객의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더욱이 고객이 대여금고에 수억, 수십억원의 현금을 넣는다고 해도 금융정보분석원(FIU)에 통보되지 않는다. 계좌를 통한 자금의 흐름은 2000만 원 이상 모두 FIU CTR(고액현금거래)로 보고되는 것이 의무이지만 대여금고 내의 재산은 본인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알기가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전 전 대통령의 일가가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대여금고를 통해 숨겨두었다는 검찰의 의심을 받고 있듯이, 탈세가 의심되는 거액의 자산가나 고의 체납자가 재산 은닉을 위해 거액을 대여금고에 숨겨둔 채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다는 것이 국세청의 설명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현금은 물론이고 등기서류나 무기명 채권, 차명 재산 내역, 금괴 등 소득 신고가 되지 않은 재산이 대여금고에 의외로 많다는 얘기들을 듣고 있다"며 "고의 체납이 의심되는 납세자가 대여금고에 재산 숨겨두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면 국세청도 압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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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국세청이 탈세자나 고의 체납자의 대여금고 정보를 확인하고 이에 대한 압류 절차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검찰처럼 압수수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무조사를 하면서 회계·세무 자료를 예치하는 권한은 있지만 이는 거의 탈세가 의심되는 납세자의 회사 건물이나 사업장이 중심이다. 비밀스러운 자료가 은닉돼 있을 가능성이 많은 탈세나 고의 체납 혐의자의 자택에 대한 예치는 거의 하지 못한다.
게다가 국세청의 예치과정은 알려진 것처럼 자료를 '쓸어 담아' 오는 것이 아니라 납세자의 동의를 구해 제출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국세청 조사국 출신 관계자는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하기 위해 모 기업 사주의 자택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어본 적 있느냐.
대여금고와 같은 은밀한 자료에 대한 정보는 회사보다는 집에 있는 경우가 많다"며 "모든 대여금고가 탈세에 악용되는 것은 아니어서 실질적으로 의심스러운 금고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