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공급과잉으로 침체에 빠진 석유화학산업 재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핵심은 과잉설비 감축과 고부가 스페셜티 전환이다. 단순 구조조정이 아니라 산업 체질을 바꾸는 전면 개편이다.
정부는 이미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정유·석화 간 수직통합, 석화기업 간 수평통합, 노후 설비 폐쇄 등을 통해 생산능력을 줄이고 포트폴리오를 바꾸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3대 석화 산단(대산·여수·울산)에서는 자율구조조정 논의가 동시에 진행 중이다.
국내 3대 석화산업단지 중 대산 산단이 처음으로 재편안을 제출한 가운데 정부도 제출 시한을 연말까지로 못 박은 만큼 여수와 울산에서도 사업재편이 속도를 낼 것이란 관측이다.
첫 신호탄은 대산이 쐈다.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HD현대케미칼이 사업재편안을 제출하면서 구조개편의 틀을 잡았다. 제출 시한을 연말로 못 박은 정부 방침을 감안하면 여수·울산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전망이다.
정부의 재편안은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과잉설비 감축 및 고부가 전환 △재무 건전성 제고 △지역경제·고용 충격 최소화 등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세 산단의 동시개편 △충분한 자구노력 △정부의 종합지원 패키지 등 3대 지원 원칙도 제시했다.
산업계도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주요 10개사가 자율협약을 통해 270만~370만t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공급과잉을 먼저 해소한 뒤 스페셜티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전략이다. 설비감축 방안으로는 △정유-석화 기업간 수직통합 △석화-석화 기업간 수평통합 △노후 설비 폐쇄 등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감축폭이 너무 커 합의가 쉽지 않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이는 정유업체를 제외한 석화기업 기준 기존 생산능력의 24~33%에 해당한다.
업체 간 눈치싸움으로 사업재편이 속도를 내지 못하던 와중에 3대 산단 중 대산 산단에서 첫번째로 사업재편안을 제출하면서 대략적인 재편 방향이 윤곽을 드러냈다.
대산은 정유사(HD현대오일뱅크)가 석화기업(롯데케미칼)을 통합하는 수직계열화 방식을 선택했다. 정유사가 석화사를 끌어안아 노후설비를 폐쇄하고 효율적인 설비 중심으로 생산을 재배치하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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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사는 사업 다각화 효과를, 석화사는 생산효율 개선을 얻는다. 글로벌 석유수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운송용 석유제품은 친환경차 확대에 따른 수요둔화 위험이 내재해 있다. 정유사들은 구조조정 참여를 통한 비정유부문 확대로 에너지 전환 대응력을 높이고 부가가치가 제한적인 납사(나프타) 판매로 추가적인 수익도 얻을 수 있다.
업체간 통합방식이 적용될 경우 여수 산단에서는 GS칼텍스(정유)와 LG화학(석화)의 수직통합이나 여천NCC(석화)와 롯데케미칼 간 수평통합 방향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울산의 경우 S-Oil(에스오일)이 내년부터 연간 180만톤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샤힌프로젝트를 가동하는 가운데 대한유화, SK지오센트릭 등이 설비를 얼마나 감축할지가 관건이다.
대산의 제출로 전체 시계는 빨라졌다. 정부는 연말까지 자율 재편안을 내지 않으면 지원에서 제외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결국 각 산단이 '어디를 줄이고 무엇을 남길지'를 서둘러 확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구조조정이 끝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사업재편 이후에도 산업 전환은 지속돼야 한다. 일본은 2000년대 중반부터 설비를 줄이고 스페셜티 투자를 확대해 구조개혁을 완성했다. 한국도 같은 길을 밟을 수밖에 없다.
전유진 아이엠증권 연구원은 "2026년은 한국, 중국, 일본, 유럽 등 글로벌 전 지역에서 구조조정 진행됨에 따라 수급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정부의 석유화학 구조조정 의지도 강한 만큼 내년에는 구조조정 방향이 보다 현실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전망"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