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장래 희망’란에 ‘의사’를 적어 본 기억이 있을 테다. 실제로 만난 의사보다 텔레비전 속 의사가 더 익숙했던 그 시절, 하얀 가운과 청진기, 어려운 의학 용어로 무장한 그들은 어린 눈에 그저 멋있게만 보였다. 어디선가 들었던 ‘생명을 다루는 숭고한 직업’이라는 표현이 그 환상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하지만 현실의 대부분이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와 함께 품는 이상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직업’이라는 현실 안에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렇기에 드라마 속 직업은 언제나 현실과의 적당한 거리에서 그려진다. 창작물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고 바라볼 때, 드라마는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속 의사들은 언제나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려진다. 지난 12일 첫 방송을 시작한 tvN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은 그 경계선에서 청춘의 고군분투를 담아낸다.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극본 김송희, 연출 이민수, 이하 ‘언슬전’)은 의료 파업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뒤늦게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 드라마는 교수들이 주인공이었던 전작과 달리,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전공의들의 성장기가 중심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시청자를 사로잡은 배우가 있다. 전작 ‘무빙’을 통해 존재감을 증명한 배우 고윤정이다. ‘언슬전’ 속 고윤정은 산부인과 1년 차 레지던트 오이영으로 분해 다소 무심하고 현실적인 얼굴로 시청자와 만난다.

극중 오이영은 극의 배경이 되는 종로 율제 병원을 한 차례 떠난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개원의의 꿈은 접었고, 빚에 쫓기다 재직증명서 한 장이 필요해 다시 병원 문을 두드렸다. 생명에 대한 숭고하고 고귀한 이념 따윈 당연히 없다. 대신 “돈만 갚으면 그만 둔다”는 명확한 목표를 품고 병원 생활을 시작한다.
첫날부터 악명 높은 교수의 수술방에 투입된 오이영은 실수를 거듭하고, 교수의 눈 밖에 난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습관처럼 붙은 모습은 오이영의 사회 초년생의 초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점차 병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오이영은 저도 모르게 환자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행동들로 교수들에게 칭찬을 받고, 동기 가운데 가장 먼저 여러 기회를 제안받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오이영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거절한다. 자신은 이 병원을 곧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오이영을 얄밉게 본 펠로우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버티지만 어느 순간 폭발하고, “내가 돈이 없지, 성질이 없냐”며 병원을 박차고 나가기에 이른다. 하지만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울리는 응급 콜은 오이영의 발목을 붙잡는다. 결국 오이영은 환자를 향해 달려가고,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구한다. 그 순간, 시청자는 깨닫는다. 오이영은 단순히 냉소주의자도, 무책임한 레지던트도 아니라는 것을.

신원호 PD는 고윤정에 대해 “예쁜 배우는 그에 맞는 태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보기 드물게 털털한 친구였다”며 캐스팅 비화를 밝혔다. 그는 고윤정에게서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 같은 모습을 보았고, 이 부분이 오이영의 캐릭터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고도 덧붙였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 고윤정은 요란하지 않은 연기로 오이영이라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채워나간다. 표정 변화는 적지만, 작은 눈빛과 숨결로 캐릭터의 감정을 정교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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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빙’에서 초재생 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 장희수를 연기하며 주목받은 고윤정은 이번 ‘언슬전’에서 현실에 눌린 청춘 오이영으로 돌아왔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표현 방식은 서툴지만 진심은 단단한 이 캐릭터를 통해 고윤정은 감정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진심으로 뛰고, 책임을 지며, 상처를 견디고도 웃을 줄 아는 오이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고윤정은 히어로보다 더 위대한 ‘진짜 사람’을 연기하고 있다.
산부인과가 탄생의 공간인 것처럼, ’언슬전‘은 고윤정이라는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탄생시킨 작품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무표정 속에서도 천 가지 감정을 담아내는 배우 고윤정의 연기가 앞으로 더 많은 작품에서 빛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