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MBC 드라마는 여느 때보다 힘들었다. 이 분위기에 반전을 준건 '판사 이한영'이다. 치열한 경쟁작들 사이에서도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작품을 이끈 이재진 PD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법정물, 회귀물이 아닌 히어로물이라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는 이재진 PD. '판사 이한영'이 위기의 MBC 드라마를 구원한 히어로가 될 수 있었던 건 이재진 PD의 남다른 통찰력과 치열한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판사 이한영' 종영을 앞둔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M스퀘어에서 이재진 PD의 인터뷰가 진행 됐다. 이날 이재진 PD는 벅찬 흥행소감부터 배우들의 캐스팅 비화, 시즌2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또한 위기에 처한 한국 드라마 산업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까지 엿볼 수 있었다.

4.3%의 시청률로 시작했던 '판사 이한영'은 10일 기준 최고 시청률 13.5%를 기록했다. MBC 역대 금토드라마 시청률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당초 목표로 했던 시청률을 뛰어넘은 것에 대해 그는 겸손하면서도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기분은 좋아요. 작년 한 해 동안 열심히 만든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았잖아요. 작년에 MBC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선이 두 자릿수였어요. 생각보다 강한 경쟁작이 있었지만, 우리 작품만의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했죠. 특히 지난해는 많은 사람들이 정의와 올바름에 대해 고민했던 시기 같아요. 마음속에서 억눌렸던 것들이 극 중에서는 빵빵 터지다 보니 통쾌하게 느껴서 잘 먹힌 것 같아요. 원작 자체는 십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보니 과한 해석은 경계하지만, 시기적으로 겹쳐 보이는 부분에 있어서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는 이 작품이 겉보기엔 법정물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히어로물이라며 명확한 기획 의도를 밝혔다.
"저는 이 작품을 정통 법정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작년에 방영된 여러 드라마들이 철저한 법정물이라면, 저희는 판타지라고 생각했죠. 회귀한 사람이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데 그 직업이 판사일 뿐인거죠. 사람들이 힘든 시기일수록 영웅을 찾게 되는데,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그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악인이 처단당하는 통쾌함이 와닿도록 했기 때문에 정교하게 법적으로 따지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그런 장르적 특성을 지닌 판타지 히어로물이라고 확신하며 연출했어요."
방대한 세계관을 브라운관으로 옮기며 원작 웹툰과 웹소설 사이에서 캐릭터를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깊이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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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보다는 웹소설을 조금 더 베이스로 삼았어요. 웹툰은 그림만으로 캐릭터의 선악과 비열함이 단번에 보이잖아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배우들이 연기할 때는 텍스트 속 인물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쉽게 설명할 방법을 찾아야 했죠. 등장인물도 많은 편인데, 시청자들이 복잡한 사건 속에서도 이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긴 이야기를 압축하며 살려야 할 인물과 뺄 인물을 정하는 과정은 최대한 작가님의 의견을 존중하며 진행했어요."

특히, 주연 배우 지성을 캐스팅하기 위해 그는 직접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열정을 보였다. 그 짧고도 강렬했던 만남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자양분이 됐다.
"지성 씨를 만나러 뉴욕을 3박 5일 정도로 타이트하게 갔다 왔어요. 연출 입장에서 궁금한 점도 있었고, 이미 판사 역할을 해보셨기에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게 필요했죠. 한두 번 만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지성 선배가 3일 내내 일정을 잡아주셨어요. 뉴욕에서의 시간 동안 4부의 대본을 바탕으로 어떤 콘셉트로 갈지, 회귀 후의 방향성을 어떻게 강화할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선배의 솔직한 의견을 적극 반영하며 작품의 기틀을 다졌어요. 그때의 3일이 드라마 전체의 방향성에 아주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현장에서 지켜본 지성의 연기는 기대 그 이상이었으며, 특히 회귀 전후의 간극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 모습에 연출자로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칭찬했다.
"지성 선배 연기는 늘 훌륭해서 한두 개를 꼬집기 힘들어요. 회귀한 이한영이 방방 뛰는 장면이 있는데, 대본 리딩 때 1부의 무거운 분위기와 확연히 대비되면서 현장에서 소름이 끼쳤어요. 확 변했구나 싶었죠. 뉴욕에서 회귀 전후를 완전히 다른 드라마로 만들어서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치자고 의기투합했는데, 진짜 배우가 그걸 연기로 증명해 주더라고요. 칼 맞고 쓰러질 때도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는 극강의 빌런 강신진 역에 박희순을 낙점한 것은, 단순한 악당이 아닌 자신만의 굳건한 신념을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었다.
"이한영의 대척점에 있는 강신진이 악인이지만 최대한 매력을 뽑아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멋있는 중년인 박희순 선배를 캐스팅했죠.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어떤 고생을 겪고 올라와 신념을 쥐게 된 악인으로 서사를 만들었어요. 강신진이 왜 이한영에게 속을 수밖에 없는지, 왜 그를 후계자처럼 키우고 싶어 곁을 내주는지에 대한 인간적인 틈을 보여주려고 했죠. '내가 맞고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비뚤어진 욕심을 매력적으로 빚어내려 노력했어요."

당초 지난해 방송될 예정이었던 '판사 이한영'은 한 차례 연기되며 올해로 넘어왔다. 편성이 연초로 밀리면서 후반 작업에 공을 들일 시간은 늘어났지만, 그만큼 고민도 깊어졌다.
"결과적으로 연초에 방영이 되면서 잘 됐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처음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11월 18일이 첫 방송이니 맞춰서 준비하라'고 오더를 받았거든요. 그에 맞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밀릴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실질적 촬영은 방송 전에 다 끝나는 걸로 되어있었고요. 후반 시간이 많아져서 만듦새를 더 신경 쓸 수 있다는 장점이라면 장점이 있었죠. 그런데 이렇게 후반작업 시간을 많이 받아본 건 처음이라 길을 잃었던 부분도 있던 것 같아요. 많이 보는 과정에서 '제대로 편집 방향을 잡았나' 싶은거죠. 분명 후반작업에서 디테일은 나아졌겠지만, 제때 나갔는 게 좋았는지 지금 나가는 게 좋았는지 판단 불가라고 생각해요."
편성이 뒤로 밀리게 되면서 비슷한 분위기의 '모범택시' 시리즈와 일정 부분 방송이 겹치게 됐다. 또한 극 중 등장하는 박광토가 실제 인물을 연상시킨다는 반응도 뒤따랐다. 이재진 PD는 이같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제가 '모범택시' 대본을 보지 못했고 방송만 봐서 특별히 비슷하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장르적 특성상 겹치는 문법이 있을 뿐이죠. 또한, 누군가를 타깃으로 한 정치적인 작품으로 엮이는 것은 철저히 경계했어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식에 맞는 정의'가 틀어지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박광토를 보며 서로 다른 진영에서 동상이몽으로 해석하시던 데 외려 정치적으로 활용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어요. 서로 불만과 아쉬움을 투영하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배우 본인이 모델로 잡은 인물이 있을지는 몰라도 기획 단계에서부터 누군가를 타깃으로 잡지는 않았어요."

이렇게 편성이 갑자기 변경되거나 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최근 드라마 제작비 상승의 영향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재진 PD 역시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며 해답을 얻기 위해 고민할 때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제일 큰 문제는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 제작비 예산이에요. 제가 입사했던 2005년엔 미니시리즈 회당 제작비가 4억 원 안팎이었는데, 지금은 과거보다 몇 배나 덩치가 커졌죠. 예전엔 30~40억 규모라면 연출자가 확신을 가지고 '이거 된다니까요'라면서 설득하고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끌고 갈 수 있는 예산이 아니에요. 물론, 수익구조를 만들어 놓고 들어가는 작품도 있지만 회사의 스탠스는 기본적으로 '드라마는 하면 적자'라고 하더라고요. 100% 성공하는 드라마는 없고 베팅을 해야하는데, 무조건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구조에서 당장 되돌아가기도 어렵잖아요. K컬쳐, 문화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역할이 돈으로 돌아오지는 않는 것 같아요. 산업이 굴러갈 수 있도록 윗선과 현업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이재진 PD는 극의 윤활유 역할을 한 로맨스 요소와 다가올 결말에 대해 귀띔하며, 많은 이들이 염원하는 시즌2 제작 가능성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예전에 유행하던 '기승전 로맨스'는 지양했지만, 약간의 멜로는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다행히 시청자분들이 예쁘게 봐주셨어요. 결말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요. 막판 11~14회에 엄청난 속도감이 몰아치지만 결코 허무하거나 속상한 전개는 아닐 거예요. 특히 작가님이 처음부터 시즌2를 기대해서 꽉 닫혔지만 열렸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회사원인 제 입장에서는 회사에서 시즌2를 가자고 하면 언제든 다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