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팝' 신설 직후 전격 불참...지역·언어 구분에 문제 제기
수상 가능성보다 아티스트 존엄 선택...포용 증명은 그래미의 몫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이 그래미 트로피보다 아티스트로서 존엄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수상 가능성이 낮아서 물러난 것도, 그래미와 연이 없어서 발을 뺀 것도 아니다. 그래미 후보 지명과 단독 무대까지 단계적으로 올라간 방탄소년단은 오히려 첫 수상에 가장 가까워진 시점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
방탄소년단 멤버 전원은 지난 29일 개인 SNS를 통해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방탄소년단은 지난 3월 발매한 정규 5집 '아리랑'(ARIRANG)으로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와 싱글 차트 정상을 모두 차지하며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또 이 앨범으로 미국 3대 대중 음악 시상식 '2026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대상격인 '올해의 아티스트'도 받았다. 더군다나 '아리랑'은 그래미가 중시하는 아티스트의 창작 참여도가 높은 앨범이다.
이 같은 성과에도 방탄소년단이 그래미 불출품을 결정한 데에는 최근 신설한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래미가 지난달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권 음악을 언어의 범주로 묶자 이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불출품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냈다는 해석이다.
그래미를 주관하는 레코딩 아카데미는 내년 2월 열리는 제69회 '그래미 어워즈'부터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 도입을 결정했다. K팝과 J팝, C팝 등 아시아 시장에서 시작됐거나 널리 인정받은 팝 음악이 대상이다. 아티스트의 인종이나 국적보다 음악 스타일을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하나 이상의 아시아 언어를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영어로만 만들어진 곡은 이 부문에 출품할 수 없다.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를 차지한 '아리랑'의 타이틀곡 '스윔'(SWIM)은 영어로만 가사가 쓰여 신설 부문 후보가 될 수 없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그룹이 한국 정서를 담은 '아리랑'이라는 이름의 앨범을 내놓았지만 타이틀곡 가사가 영어라는 이유로 '아시안 팝'에서 제외된 셈이다.
결국 그래미가 규정한 아시아 음악의 출품 자격은 아티스트의 문화적 배경이나 작품의 맥락보다 가사에 사용된 언어로 갈린다. 그래미가 2024년 신설한 '베스트 아프리칸 뮤직 퍼포먼스'가 특정 언어 사용을 요구하지 않고 아프리카와 디아스포라의 음악적 표현과 문화적 특성을 기준으로 삼은 것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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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방탄소년단이 신설 부문의 후보가 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아시아 아티스트가 영어로 노래하면 기존 팝으로, 아시아 언어를 사용하면 별도의 지역 음악으로 분류되는 구조에 있다. 그래미가 K팝 등 아시아 음악의 영향력을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되자 주요 부문의 문을 넓히는 대신 비영어권 음악을 위한 별도 통로를 만든 것 아니냐는 의심이 일고 있다. 규정상 아시아 언어를 사용한 곡도 다른 부문에 도전할 수 있지만 별도 부문이 생기면 그 안에서만 평가될 우려가 크다.
그래미는 오래전부터 이 문제로 비판받았다. 공식적으로 인종에 따라 후보 자격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흑인 아티스트의 음악을 랩과 R&B 등 특정 장르 부문에 집중시키고,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등 주요 본상에서는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반복됐다.
흑인 음악을 폭넓게 묶어온 어반이라는 명칭도 같은 맥락에서 논란이 됐다.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2020년 흑인 아티스트가 장르의 경계를 넘는 음악을 만들어도 랩이나 어반 부문으로 분류된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지적이 음악계 전반으로 확산하자 레코딩 아카데미는 '베스트 어반 컨템퍼러리 앨범'을 '베스트 프로그레시브 R&B 앨범'으로 변경했다.

같은 해에는 '베스트 월드 뮤직 앨범'도 '베스트 글로벌 뮤직 앨범'으로 이름을 바꿨다. '월드 뮤직'이라는 표현이 서구권 음악을 중심에 두고 그 밖의 음악을 '비미국적 음악'으로 묶는 식민주의적 관점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반영한 조치였다.
그래미가 과거 포괄적 지역 명칭의 문제점을 인정하고도 다시 아시아 음악을 '아시안 팝'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담은 것은 그래서 더 차별적인 퇴행으로 보인다.
'스윔'이 신설 부문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이번 불출품의 의미를 오히려 선명하게 만든다. 방탄소년단은 '아리랑'과 '스윔'으로 기존 팝 부문과 주요 본상에 도전할 기회까지 내려놓았다. 트로피보다 음악을 지역과 언어로 나누는 기준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가 포용으로 인정받으려면 아시아 음악이 이 부문 밖에서도 지속적으로 후보에 오르고 수상해야 한다. 영어로 부르면 글로벌 팝이고 아시아 언어로 부르면 '아시안 팝'이라는 구분이 굳어진다면 이는 기회의 확대가 아니라 차별이다.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그래미는 언어로 음악의 울타리를 세웠다. 그 경계가 아시아 음악을 주요 부문으로 이끄는 입구인지, 그 안에만 머물게 하는 또 다른 천장인지 증명해야 할 책임은 이제 그래미에 있다.